부동산에 관심 가진 지 어느덧 4년, 새로운 동네에 가면 그곳의 아파트를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 동네의 상권, 학군, 교통, 일자리는 어떤지, 옆 동네 비슷한 연식의 아파트는 얼마였는데 이곳의 아파트 가격은 얼마인지, 왜 가격 차이가 발생하는지 분석하는 게 재밌었고 직방이나 호갱노노 어플로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는 게 취미가 되었다.
이제 갓 회사에 취업한 나의 시드머니는 소소했지만 꾸준히 부동산 공부를 하면서 내가 살고 싶은 집의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봤다. 부동산 관련 블로거나 유튜버 분들의 인사이트도 계속 찾아봤고,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블로그 이웃님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투자 스터디에도 여러 번 참여했다.
덕분에 관심 지역이던 수도권 아파트 시세는 훤히 알게 되었지만 내 집 마련은 아직 먼 얘기 같았다. 부동산을 매수하려면 시드머니로 최소 1억은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입 사원인 나에게 그 정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이 지역 부동산이 오를 것 같은데 투자금이 모자라서 매수하지 못할 때의 막막함이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부동산 관련 글이나 기사를 보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돈을 모아서 부동산을 매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날이 커져갔다.
부동산 매수의 트리거가 되어 준 사건은 한 이웃 블로거님과의 만남이었다. 나와 동갑인데도 이미 부동산 투자 경험이 여러 차례 있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 선배 투자자로서 부동산에 대해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고민도 털어놨다.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회사에 다녀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취업 전 블로그를 비롯한 부수입의 기반을 탄탄히 다져둔 덕분에 월급과 그 외 수입이 매달 비슷하게 들어왔다. 같은 돈을 버는데 비교적 덜 자유로운 회사에 다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분은 나에게 집을 지르는 게(!) 어떻냐고 했다. 부동산을 매수하게 되면 대출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 꾸준히 다녀야 할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먼저 취업한 친구들도 나에게 회사가 너무 싫을 땐 할부를 긁으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종종 하긴 했다. 실제로 본인들은 자동차, 가방, 성형수술 등을 몇 년 할부로 질러버려서 빚 갚는 게 끝날 때까진 퇴사를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소비에는 관심이 없어서 웃고 넘어갔는데, 부동산을 할부로 지르라니 신박한 조언이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괜찮은 방법 같았다. 어차피 언젠간 내 집 마련을 해야 하고, 대출을 갚기 위해 회사에 꾸준히 다님으로써 쌓이는 신용도와 대출 상환 능력, 성장하는 부동산 자산은 나에게 꽤 괜찮은 미래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가진 돈과 신용대출 금액을 합쳐 매수할 수 있는 곳을 추려봤더니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그중에는 꽤 괜찮은 곳도 몇 개 있었다. 어쩌면 올해 안에 내 집 마련이 가능하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날부터 매수 가능한 지역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의 부동산은 2020년부터 급등하고 있었다. 부동산 상승 후발 주자인 만큼 전국 지역별 상승률 중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무섭게 집값이 오르는 중이었다. 이미 너무 올라버린 이 동네 부동산을 매매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여기서 너무 멀리 벗어나는 것도 곤란하다. 직장도, 본가도 인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직이 잦은 업계에서 일하는 만큼 타 회사로 이직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리고 업계 대부분의 회사는 강남, 용산, 광화문 쪽에 몰려 있다. 이걸 바탕으로 내가 선정한 매수 지역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본가와 너무 멀지 않은 경기 남부 지역
2. 대중교통으로 1시간 이내에 서울에 갈 수 있는 곳
각 지역에서 5억 원 이하로 살 수 있는 아파트의 컨디션을 파악했다. 같은 가격인데도 A지역에서는 30년 된 구축 아파트를 살 수 있다면, B지역에서는 신축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입지 좋고 이미 상권이 갖춰진 곳일수록 아파트가 오래되었고 반대 조건일수록 새 아파트였다. 여기서 나의 선택지는 2가지였다.
1. 입지 좋은, 재개발 재건축 가능성이 있는 오래된 구축을 사서 몸테크
2.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개발 계획이 많은 새 아파트 분양
처음에는 1번에 더 무게를 뒀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아파트 시세 조사를 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B지역의 아파트가 상대적으로 너무 저렴해 보였기 때문이다.
B지역과 타 수도권 도시의 배후 수요, 서울 접근성, 주거 환경 차이가 있기에 가격이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정도 가격 차이가 날 정도로 B지역의 입지가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B지역이 상승 후발 주자였기 때문이다. 수도권 대부분의 지역은 이미 한두 차례 이상 큰 상승이 있었다. 그렇지만 B지역은 이제 막 상승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을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지역 손품 조사를 완료하고 이제 실제 분위기를 봐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직접 부동산에 들렀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때는 한창 상승기의 절정이었고 당연히 매수자보단 매도자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딘가 바쁘게 전화를 하고 있는 사장님과, 집을 사고 싶어 줄을 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이 보였다.
이 동네에 몇 천 세대 대단지가 분양하는데도 매물이 얼마 없다고 했다. 망설이면 바로 집이 팔린다고 했다. 가볍게 부동산을 보러 갈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급박한 분위기에 쫓겨 내 마음도 조급해졌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몇 십 개씩 매물이 동나는 모습을 보니 빨리 사야 할 것 같았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천천히 더 생각해 보자고 겨우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하지만 며칠 뒤 내 손에는 어느새 부동산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그마저도 기존에 찜한 저렴한 매물은 모두 팔려서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 중 고른 거였다. 퇴근 후 부랴부랴 B지역으로 달려가 매수 계약서를 쓰고 나니 어느덧 밤 10시. 계속 부동산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저녁을 굶었다. 근처에 문을 연 가게가 없어 아무 분식집이나 들어갔다. 김밥은 싱거웠고 쫄면은 불어 터졌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집을 샀다니! 내 집이 생겼다니!
20대 내내 목표해 왔던 내 집 마련을 조기 달성했다. 그것도 수도권 신축 브랜드 아파트로! 불어 터진 쫄면을 먹으면서도 실실 웃음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꿈만 같았다. 아직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 펜스를 한 바퀴 산책하며 이 집에 입주할 날을 그려봤다. 그날의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취업한지 반년만에 내 집 마련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