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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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 차이가 아닌 세대 단절 ① : 현상과 그 본질
• 세대 차이가 아닌 세대 단절 ② : 과거에 대한 불신
• 세대 차이가 아닌 세대 단절 ③ : 명분과 실리 사이 괴리
• 세대 차이가 아닌 세대 단절 ④ : 다가올 미래와 대응 방안 (끝)
명분과 실리 사이의 괴리. 말과 행동의 불일치. 이것이 바로 세대 단절을 더 깊게 만드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기성세대는 좋은 말을 한다. 교육 개혁, 지역 균형, 재벌 개혁, 출산율 제고—모두 옳은 말이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공청회에서, 토론회에서, 언론 인터뷰에서—이런 주제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전문가들은 보고서를 쓰고, 정치인들은 공약을 내걸고, 시민단체들은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행동은 다르다. 교육 개혁을 외치면서 자식은 강남 학원에 보내고, 지역 균형을 말하면서 본인은 서울에 살고, 재벌 개혁을 주장하면서 대기업 취직을 최고로 여기고, 출산율 제고를 말하면서 젊은 세대를 비난한다.
이 괴리를 젊은 세대는 명확하게 본다. 그리고 냉소한다. 결국 말뿐이구나. 본인 이익은 챙기면서 명분만 내세우는구나. 개혁을 외치는 사람도, 그 개혁의 대상이 본인이 되는 순간 태도가 바뀐다. 이게 바로 불신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보자. 진보 성향의 교수가 있다. 그는 학벌 사회 타파를 외치고, 교육 평등을 주장하고, 공교육 정상화를 역설한다. 강연에서, 칼럼에서, 방송에서—그는 일관되게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그의 자녀는 어디에 다니는가? 외고를 나와 SKY에 진학했다. 사교육은? 중학교 때부터 강남 학원을 다녔다. 이건 위선이 아니냐고 묻으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나 혼자 안 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고. 내 자식만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이 말이 틀렸는가? 틀리지 않다. 개인의 선택으로서는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교육 개혁을 외칠 자격이 있는가? 본인부터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가?
이런 이중성은 모든 영역에서 반복된다. 환경 운동가는 SUV를 타고, 채식을 권장하는 인플루언서는 스테이크를 먹고, 소비 절제를 외치는 작가는 명품 가방을 든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명분과 실리의 괴리를 보여준다.
젊은 세대는 이런 모습을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본다. 과거에는 공적 발언과 사적 행동이 분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투명하다. 인스타그램 피드 하나, 유튜브 영상 하나로 사적 행동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순간, 명분은 무너진다.
더 심각한 건, 문제를 인식했을 때의 반응이다. 급속한 성장 속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국가·민족 차원에서 큰 아젠다에 대해서는 모두가 심각성을 인지하고 개선에 참여해야 한다. 과거 한국은 그랬다.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이 그랬고, 88올림픽 준비가 그랬고, 월드컵 응원이 그랬다. 위기가 오면 함께 극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심지어 문제를 알게 되면, 우리나라는 함께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나라도 외국 이민 가야지, 자식이라도 유학시켜야지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다. 이건 기성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걸 모두가 안다. 이대로 가면 다음 세대는 집을 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값을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집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한다. 내 자산 가치가 떨어지니까.
그리고 더 영리한 사람들은 뭘 하는가? 해외 부동산에 투자한다. 캐나다, 호주, 미국—어디든 좋다. 한국 부동산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자산을 해외로 분산한다. 한국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니라, 개인 자산만 지킨다.
교육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육이 병들었다는 건 모두가 안다. 입시 경쟁, 사교육 과열, 학벌 지상주의—이 모든 게 문제라는 걸 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뭘 하는가? 자식을 유학 보낸다. 조기 유학, 국제학교, 해외 대학—돈만 있으면 한국 교육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다. 그래서 여유 있는 집안은 그렇게 한다. 한국 교육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만 빠져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한국 교육은 망했다고. 여유 있으면 외국 보내는 게 맞다고.
더 충격적인 건, 이게 기성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더 노골적이다. 20대, 30대 청년들에게 물어보라.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대부분 부정적으로 답한다. 저출산, 고령화, 연금 고갈, 부동산 버블—모든 게 암울하다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면? 이민 가고 싶다고 답한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어디든 좋다. 한국을 떠나는 게 답이라고 말한다. 돈을 벌게 되면 한국에 재투자하기보다는 해외 자산으로 돌리거나, 영주권을 준비한다고 한다. 한국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보다는, 한국을 떠나는 게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2025년 기준 20~30대의 이민 희망률은 40%를 넘는다. 특히 고학력, 고소득 청년일수록 이민 의향이 높다. 즉, 사회를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떠나려 한다. 한국을 포기하려 한다. 개발자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면 연봉이 2~3배라고 말한다. 집값은 한국보다 싸고, 워라밸은 보장되고, 자녀 교육도 덜 경쟁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남을 이유가 없다고 한다. 애국심?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이 나라가 자신에게 해준 게 뭔데 자신이 희생해야 하냐고 반문한다.
이건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이다. 이 사회는 나아질 수 없다는, 함께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이다. 문제를 보면 해결하려 하지 않고, 도망치려 한다. 기성세대도, 젊은 세대도, 모두 마찬가지다.
과거 세대는 적어도 이 땅에 머물렀다. 문제가 있으면 부딪혔다. 민주화 운동이 그랬고, IMF 극복이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부딪히지 않는다. 회피한다. 탈출한다. 각자도생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젊은 세대에게 남은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경멸감 혹은 혐오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한 실망이나 불만을 넘어선, 더 깊은 감정이다. 경멸감은 신뢰의 완전한 붕괴에서 온다. 한때 믿었던 대상이 배신했을 때, 실망을 넘어 경멸하게 된다. 젊은 세대는 한때 기성세대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어 했다. 그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줄 거라고, 그들의 경험이 우리를 이끌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배신당했다. 기성세대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쁜 사회를 물려줬다. 그들의 경험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짐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세대를 탓했다. 그래서 존경할 수 없다. 따르고 싶지 않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메신저를 바꾸고, 커뮤니티를 바꾸고,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 물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분리된다.
혐오감은 더 나아간다. 혐오는 단순히 싫어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영포티를 희화화하는 것도, 꼰대 문화를 조롱하는 것도, 모두 혐오의 표현이다. 그들의 방식을, 그들의 가치를, 그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 감정은 단순히 세대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니다. 배신감에서 온다. 위선에서 온다. 무책임에서 온다. 기성세대가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면, 책임을 졌다면, 희생을 감수했다면—이런 감정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멸받고, 혐오받는다.
더 이상 한국에서는 지향해야 할 가치가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공동체, 연대, 희생, 헌신—이런 단어들은 이제 공허하게 들린다. 누가 진심으로 믿는가? 누가 실천하는가? 기성세대는 이런 가치를 입으로는 외친다. 하지만 행동으로는 정반대로 한다. 공동체를 말하면서 개인 이익을 챙기고, 연대를 외치면서 자기 편만 돕고, 희생을 강조하면서 본인은 희생하지 않고, 헌신을 권하면서 본인은 도망친다.
이게 바로 명분의 가면을 쓴 이기주의다. 겉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겉으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편법을 쓴다. 그리고 이 가면은 점점 벗겨지고 있다. SNS 시대에는 가면을 쓰기 어렵다. 공적 발언과 사적 행동의 괴리가 즉시 드러난다. 환경 보호를 외치는 정치인의 전용기 사용 내역이 공개되고, 검소함을 강조하는 CEO의 명품 시계가 포착되고, 평등을 말하는 교수의 자녀 특혜가 폭로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점점 무뎌진다. 어차피 다 그렇지, 말과 행동이 다른 건 당연하지—이런 냉소가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 냉소는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린다. 젊은 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차라리 명분 중심적인 가면을 벗고 명확하게 자유 경제주의라고 하면 좋겠다고. 각자도생이 원칙이라고, 약육강식이 룰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차라리 낫겠다고. 하지만 기득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권리는 놓고 싶지 않고, 명분은 쌓고 싶고—이 괴리가 쌓이다 못해 터지기 전의 풍선 같다고 느낀다.
그런 상황에 신기한 현상이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는 자기계발류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다. 성공한 CEO의 아침 루틴, 억대 연봉자의 하루, 재테크 고수의 투자 비법—이런 콘텐츠가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한다. 과거 힐링캠프가 그랬던 것처럼,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고난을 극복한 과정을 공유하고, 후배 세대에게 조언을 건네는 콘텐츠들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제는 단순히 성공 스토리만이 아니라 멘토형 콘텐츠도 쏟아진다. 선배가 후배에게, 경험자가 초보자에게, 성공한 이가 도전하는 이에게—인생 조언, 커리어 조언, 관계 조언을 아낌없이 쏟아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이런 시대에 왜 그럴까? 사회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고, 신뢰할 대상이 없을 때—사람들은 더 간절하게 멘토를 찾는다. 롤모델을 원한다. 귀감이 될 만한 존재를 갈망한다. 나를 이끌어줄 선배를, 조언해줄 어른을, 본받을 만한 성공자를 찾는다.
하지만 현실에 그런 존재가 없다. 정치인은 부패했고, 기업인은 위선적이고, 교수는 이중적이고, 언론인은 편향적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 회사 선배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부모 세대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사회 지도층은 신뢰를 잃었다. 그러니 유튜브에서라도 찾는 것이다.
적어도 현실에 그런 존재들이 없으니 거기서라도 채우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환타지 소설인 것이다. 그냥 환타지도 아니고 거의 라이트노벨 수준이다. 완벽한 아침 루틴, 흔들림 없는 원칙, 명확한 성공 공식, 일관된 가치관, 후회 없는 선택—모든 게 너무 깔끔하고, 너무 이상적이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유튜브 속 멘토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갈등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었고, 모든 고난에는 의미가 있었고, 모든 성공에는 원칙이 있었다. 그들의 인생 조언은 명쾌하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이것만 지키면 된다고, 이 길을 가면 된다고 말한다. 적어도 그들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조금의 흠도 없기를, 한 치의 위선도 없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유튜브 멘토들은 더 완벽한 척해야 한다. 더 일관되어야 하고, 더 도덕적이어야 하고, 더 성공적이어야 한다.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멘토로서—흠 없는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허상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사생활 이슈가 나타나면 더 끝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완벽한 멘토라고 믿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인생 조언을 해주던 선배가 실제로는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았고, 성공 스토리 뒤에는 편법과 운이 숨어 있었다. 완벽하길 바랐는데, 결국 똑같구나. 이 실망이 더 큰 냉소로 이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멘토를 찾는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이건 건강하지 않다. 현실에서 멘토를 찾지 못하고, 가상에서 완벽한 존재를 찾는 건 병적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현실의 어른들이 신뢰를 잃었고, 주변의 선배들이 실망을 주었으니, 가상의 멘토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상의 멘토마저 무너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끝없는 멘토 찾기, 끝없는 실망, 끝없는 냉소.
물론 이 모든 비판이 젊은 세대가 정의롭고 떳떳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젊은 세대도 이기적이다. 냉소적이다. 단기적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선하고, 연대보다 경쟁을 택하고, 희생보다 회피를 선택한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적어도 위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솔직하다. 나는 이기적이라고, 나는 개인주의자라고, 나는 한국을 믿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가면을 쓰지 않는다. 명분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냥 솔직하게, 냉정하게, 각자도생을 선언한다.
대기업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취업난 속에서 가장 선호하는 곳은 대기업이다. 재벌 구조를 문제 삼으면서도, 삼성, 현대 입사를 최고의 성공으로 여긴다. 물론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없다는 변명은 할 수 있다. 중소기업은 불안정하고, 스타트업은 위험하고, 안정적인 건 대기업뿐이니까.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도, 생존 앞에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한 건 스타트업이다. 젊은 세대는 수직적 대기업 문화를 비판하며 스타트업을 창업한다. 우리는 다르다고, 수평적이라고, 자유롭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만든 스타트업은 어떤가?
대기업 회장이나 임원보다 더한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창업자는 모든 결정을 혼자 내리고, 직원 의견은 듣지 않고, 야근을 당연시하고, 월급은 제때 못 주면서 열정을 요구한다. 대기업에서 비판했던 그 모든 것을, 더 극단적으로 재현한다. 한 스타트업 직원은 대기업보다 더 꼰대스럽다고 말한다. 적어도 대기업은 시스템이라도 있는데, 스타트업은 대표 기분에 따라 모든 게 바뀐다는 것이다. 수평적 문화라더니, 실제로는 대표가 왕이라고 한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심으로 우리는 달라야 한다는 과도한 조직 문화도 문제다. 회식은 안 하지만 술자리는 잦고, 출퇴근은 자유롭지만 메신저는 24시간 확인해야 하고, 수평적이라지만 반말 강요는 있다. 형식은 바꿨지만 본질은 똑같다. 아니, 어쩌면 더 교묘하다. 대기업의 노골적인 수직성보다, 스타트업의 위장된 수평성이 더 가혹할 수 있다.
결국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판은 하지만 실천은 안 하고, 변화를 외치지만 권력을 쥐면 똑같아진다. 차이가 있다면 더 솔직하다는 것뿐인데, 그마저도 의심스럽다.
이게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기성세대처럼 공동체를 외치면서 개인 이익을 챙기지 않는다고, 희생을 강요하면서 본인은 도망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환상일 수 있다. 젊은 세대도 권력을 쥐면, 지위를 얻으면, 기득권이 되면—똑같이 위선적이 된다.
어쩌면 이게 더 건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환상이었다. 위선보다는 솔직한 이기주의가 낫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둘 다 문제다. 솔직한 이기주의도, 위선적인 이기주의도, 둘 다 사회를 무너뜨린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태도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솔직하게 이기적이면, 공동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냉소적이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도생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위선적인 기성세대도 문제고, 냉소적인 젊은 세대도 문제다. 둘 다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하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를 회피하고, 서로에게서 멀어질 뿐이다.
명분과 실리의 괴리는 점점 커지고,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반복되고, 함께 해결하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각자 탈출만 꿈꾼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경멸하고, 그 사이에서 균열은 깊어진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단절은 더 굳어진다. 이제는 단순히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 아니라, 같은 사회에 살고 싶지 않은 수준이 되어간다. 메신저를 바꾸고, 공간을 나누고, 가치관을 분리하고, 미래를 따로 그린다.
이대로 가면 10년 후, 20년 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될까? 세대 간 협력은 가능할까? 공동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분리된 사회, 각자도생만 남은 사회가 될까? 그 미래는 이미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