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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May 25. 2022

앗 이런, 오늘은 잘 안 풀렸넹

매일 발행 53일차

어제는 정말 역대급으로 망한 하루였다.


계획은 이러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피아노학원에 간다. 딱 40~50분만 연습하고 8시반까지 귀가해 '인생 뒤풀이' 2편을 쓴다. 시간이 남으면 잠깐 VR게임을 한 뒤, 11시 전에 불 끄고 누워 책을 읽다가 잔다.


실제로 내가 보낸 하루는 이러했다. 저녁을 먹고 피아노학원에 다녀와 8시 10분쯤 집에 도착한 것까지는 완벽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자, 심상찮은 피로가 덮쳐왔다. 일단 컴퓨터를 켜고 작업을 시작해보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누워 있었다. 오늘도 망했구나 하는 예감과 함께 다시 의자 위로 기어올라간 때는 대략 10시쯤.


전날 발행한 인생 뒤풀이 1편은 제목 그대로 망자들이 저승에 모여 인생 뒤풀이를 간다는 얘긴데,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뒷일을 전혀 생각지 않고 주인공이 강당을 빠져나가는 대목에서 끝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어질 전개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내일의 나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공을 넘겨받은 '내일의 나'는 최대한 재밌는 뒷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졸음으로 멍해져 버린 머리에서는 이거다 싶은 전개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릴레이소설이라고 치고 막장전개로 튀어버릴걸 그랬나?


하여간, 슬슬 위기감에 휩싸인 나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선택을 하고 말았으니, 전부터 궁금했던 만화 <그리고, 또 그리고(히가시무라 아키코)> 1권을 결제해버린 것이었다......(이하 스포有)


만화 내용은,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던 만화가 지망 고등학생이 엄격한 그림 선생님을 만나 가차없는 팩트폭행을 당하며 혹독한 훈련으로 미대에 합격한 뒤, 나태한 대학생활과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을 거쳐 만화가가 된다는 줄거리였다.


"아직도 이것밖에 못 그렸나? 도대체 그거 하나 데생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리는 거야? 느려도 너무 느리잖아! 이 굼벵이 녀석아----!!"


자정이 넘도록 내 할 일을 미룬 채 이런 대사를 읽고 피식거리고 있다니... 웃음이 나오냐? 응? 웃음이 나와?????


전체 5권 중에 3권까지 정주행하고 나니 새벽 1시였다. 컵라면 한 사발까지 야무지게 말아먹고 디카페인 라떼에 무알콜 맥주까지 마신 뒤였다. 주제에 몸 생각은 한다고 디카페인에 무알콜은 꼬박꼬박 챙기고 앉았다. 그나마 3권에서 멈출 수 있었던 것은, 나처럼 대책없이 팽팽 노는 듯 보였던 주인공이 사흘 만에 그려낸 첫 작품으로 데뷔를 했기 때문이다. 이 만화도 결국은 성공한 작가의 회고담이었던 것이다...


만화 창은 닫았지만, 그때부터 한글파일에는 소설 뒷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난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드디어 여기서 실패하는 건가' 등등의 글이 채워지기 시작했고....ㅋㅋㅋㅋㅋㅋㅋㅋ 새벽 3시가 되자 전격 주제변경을 단행, 아이패드를 꺼내 팍팍팍팍 점을 찍고 쓱싹쓱싹 색을 칠한 뒤 옛날옛적 얘기를 짧게 덧붙여 발행해버렸다. 그때 시각 대략 포에이엠. 새벽 4시.


분명 8시 10분에 책상 앞에 앉았건만.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건만...!


수면시간이 2시간 37분인데 ‘충분히 깊은 수면’을 했다고? 삼성헬스 너 믿어도 되는 거니...


100일간 매일 발행, 아무도 이 짓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번 결심만은 지켜낼 수 있을지, 나라는 인간 안에 어떤 가능성들이 잠겨 있는지, 잠겨 있기는 한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 안의 가능성 중에는 밝은 가능성뿐만 아니라 어두운 가능성 역시 득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발견하고 있다.


세상에는 마감에 허덕이며 괴로워하는 작가들이 숱하게 많고, 나 또한 그중 1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내가 글쓰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회의와, '이런 식으로 겨우 써낸 글은 독자들이 보기에도 억지로 쓴 티가 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글쎄, 대범한 사람이라면 '앗 이런, 오늘은 잘 안 풀렸넹(긁적긁적)' 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는 문제일까?




이렇게 혼자 생난리를 치고, 다음 날이 되어 생각을 해보았다. 어제는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어떻게 해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수십 년간 똑같이 해온 것 같지만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1. 글쓰기 외의 취미생활은 되도록 주말에 할 것.

2. 짧은 시간 집중하는 연습을 가볍게, 자주 시도할 것.

3. 잘 쓰려는 욕심을 최대한 버릴 것.

4. 명상을 해볼까..........-_-...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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