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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Oct 03. 2022

아침 산책의 발견


이른 아침 운동화를 신고 나선다.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공원 뒷길을 골라 산책을 시작한다. 마스크를 코에 걸치고 걷다가 사람들이 가까워지면 얼른 마스크를 쓴다. 아침이 주는 상쾌한 공기와 자연의 다양한 냄새를 즐기고 싶어서이다.      


넓게 잘 꾸며진 공원길은 사람들이 많아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다. 산책의 즐거움 중 하나인 여러 가지 자연의 냄새를 포기해야 한다. 좁은 길로 걷다 보면 사람이 적어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부담도 적고 흙냄새며 나무 냄새며 자연이 내뿜는 향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천천히 걷는다. 얼마 전 친구의 가르침에 따라 어깨도 앞뒤로 움직이며 걷는다. 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면서 헛둘헛둘 구령을 넣어준다. 키가 큰 나무속에 숨어있는 까치는 빨리 자기 영역에서 사라지라고 이상한 소리로 꺽꺽 울어대고 난리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나보다 몇 걸음 앞에서 날아다닌다. 낮은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엇박자로 팔다리를 놀리는 나를 내려다본다. 가끔 구우구우 우는 소리가 크큭크큭 나를 비웃는 소리 같다. 날개 달린 것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깨와 팔을 날개처럼 펄럭이며 걷는다.     


아침 해는 부지런히 몸을 굴려 느릿느릿 산책하는 내 무릎에서 허리춤 높이까지 올라가 있다. 몇 걸음 걸을 때마다 길바닥에 햇빛이 한 줌씩 더 뿌려진다. 공원 한 귀퉁이가 환하다. 나이 많은 잣나무의 무성한 그림자를 뚫고 내려온 금빛이 나무 한 그루를 흥건히 적시고 있다.    

  

계수나무다. 나무 근처에 가니 달콤한 냄새가 난다. 나무 밑에 서니 더욱 진해진다. 햇볕에 오래 조려진 수액이 조청처럼 단내를 풍긴다. 멀리서 날아온 우주의 온기로 나무가 감미롭다. 가지마다 동글동글한 잎들이 반짝거린다.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풀 위로 노란 잎들이 뚝뚝 떨어진다. 묽은 조청이 주걱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잠시 그 앞에 서서 가을 아래 가을을 본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유치원 울타리 대신 심은 쥐똥나무 열매가 파랗다. 까맣게 변하려면 한참 더 햇볕에 볶아져야겠다. 쥐똥나무 틈새를 비집고 나와 피어있는 작고 하얀 꽃들을 구경한다. 미국쑥부쟁이다. 지난주 만해도 콩 한 알보다 작던 꽃봉오리들이 팝콘처럼 타닥타닥 터져있다. 며칠만 더 지나면 이곳은 벌들이 잉잉거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꽃구경을 할 것이다. 연두색 쥐똥나무 열매와 하얀 미국쑥부쟁이 꽃들 사이로 아주 연한 보라색의 꽃들이 피어있는 것이 보인다. 더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넝쿨이다.     

 

박주가리다. 박주가리 꽃은 처음 본다. 겨울에 열매를 본 적은 있다. 새의 깃털처럼 생긴 열매의 갈라진 틈 사이로 씨앗들이 빠져나와 날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람이 살짝 불던 겨울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깊고 파란 하늘에 은색으로 반짝거리며 떠다니는 씨앗들이 아름다워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구경을 했었다.      

꽃은 씨앗과 느낌이 다르다. 꽃잎은 두툼하고 색도 흐릿하다. 심지어 솜털이 달려있어서 꽃에 별로 시선이 가지 않는다. 나도 오늘 다른 꽃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얼마 전에 박주가리에 대한 글과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이 꽃이 박주가리의 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걸음 뒤로 서서 보니 쥐똥나무와 쑥부쟁이 전체에 박주가리 넝쿨이 뒤덮여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쥐똥나무 뒤 감나무에도 감겨있다. 꽃을 자세히 보는데 열매가 보인다. 아직 엄지손가락만 하다. 다 자라면 작고 길쭉한 고구마 크기가 된다. 열매는 아직 연두색이다. 껍질은 두꺼워 보인다. 넝쿨 줄기를 따라 이리저리로 눈길을 옮겨보니 제법 열매가 많다.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것부터 다 자란 것까지 꽤 많다.      


오늘 관찰하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꽃마다 열매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꽃이 달려있던 가지 끝에 한두 개의 열매만 달려있다. 처음 꽃송이가 달리는 곳은 줄기처럼 매끈하고 가늘지만, 꽃이 피었다가 지고 열매가 달릴 때가 되면 줄기보다 훨씬 굵어진다. 그 끝에서 열매가 크게 자라기 시작한다.     


열매와 꽃을 따서 집에 와서 자세히 살펴봤다. 마치 자연 관찰하는 학생처럼 열매를 반 갈라 아직 여물지 않은 씨앗 덩어리를 꺼내 보았다. 조그맣고 하얀 씨앗 끝에 가느다란 실들이 달려있다. 겨울이 되어 열매가 익으면 씨앗은 까맣게 변하고 실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진다.  박주가리는 열매 하나에 들어있는 씨앗의 수가 엄청 많다. 겨울에 이것들이 전부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떠돌다 뿌리내린다면 대단한 번식력이다. 

  

완전히 열매가 익고 바람이 껍질을 툭 건드리면 껍질이 쩍 갈라지면서 씨앗은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여러 가닥의 은색 실들이 프로펠러처럼 돌면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파란 하늘에 순간적으로 은빛 점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장관을 보여준다. 코끝이 빨개지고 발가락이 시리고 치켜든 목이 뻣뻣해지더라도 한참을 서서 멋진 비행을 구경하게 된다.      


올겨울 쾌청한 어느 날 하늘에서 빛을 내는 씨앗을 본다면 오늘 이 가을날의 금빛과 달콤함과 신기함도 같이 반짝이며 떠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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