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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Oct 18. 2022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날들

  

작년 오늘 기록해둔 글이 보인다.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특별히 바쁘지도 않고 특별히 무료하지도 않다. 펄펄 원기가 넘치지도 않고 표 나게 많이 아프지도 않다. 그런데 계속 아프다. 어깨가 아프다가 속이 쓰리다가 허리가 아프다가 속이 부대끼다가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잇몸이 부었다.'


작년 오늘뿐 아니라 재작년 이맘때도 비슷했다. 신기하게도 올해 이즈음도 그렇다. 어깨가 아프다가 속이 쓰리다가 잇몸이 붓다가 허리가 아팠다.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약을 챙겨 먹고 겨우 통증을 다스렸다. 그러니까 올해 허리가 아프고 다리에 경련이 생겨 고생한 것이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 매년 가을이면 찾아오는 몸의 가을맞이다. 올해 들어 생긴 특별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올가을은 작년보다는 바쁘다. 한편으로는 조심조심 살살 게으르게 살아야지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서 괜히 바쁘다.      


어제는 야근하고 퇴근 후 세 시간을 자고 눈 비비고 일어나 서울 가서 강의를 듣고 집에 왔다. 집에 오니 아홉 시 반이었다. 대충 씻고 바로 잠이 들어 새벽 여섯 시에 눈을 떴다. 잠이 들면 한두 시간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나로서는 드물게 푹 잤다. 잠을 충분히 잤더니 비로소 피곤이 눈꺼풀에서 떨어졌다.      


시월 들어 계속 월요일이면 아침에 퇴근해서 잠깐 자다가 낮에 강의 들으러 학교 갔다가, 학교에서 곧장 다시 밤에 출근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수요일도 퇴근 후 바로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간다. 그렇게 월요일과 화요일과 수요일을 보내고 나면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멍해지는데 먹고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으니 하루 잠깐 비몽사몽 보내고 다시 출근한다. 게다가 제 몸의 에너지를 생각하지 않은 머리가 신청해놓은 강의가 있어서 토요일마다 신촌을 나갔다 온다.     


장원급제를 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는, 그럴듯한 성공사례에나 나올 듯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맞는다.      


하지만 몸이 바쁘고 덜컹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날’들이 작년과 다름없이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하루하루를 시간에 쫓겨 헉헉거리지만, 헉헉거림이 한숨으로 변해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곤혹은 없다.      


작년에 써놓은 글에는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지만, 몸이 부대끼면 과거의 나쁜 일들이 떠 오른다’는 문장이 덧붙여져 있다. 작년까지는 몸이라는 수레가 덜컹거리면 지나간 아픔이나 슬픔의 덩어리가 다시 나타나 얹어져 사는 일이 무거워졌었다.      


올해는 그렇지 않다. 현실이 매우 바빠서 과거 따위는 스며들 틈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의 시선이 지나간 시간보다 다가올 시간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시간을 쓰다 보니 지나간 고달픔을 곱씹을 시간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한두 해는 오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힘들었고 그 후 한두 해는 겨우 찾은 얄팍한 편안함이 바스러질까 봐 불안해했다. 올해는 다르다.      


현실적으로는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처지는 변함없다. 오히려 새로 빚을 내줄 은행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다. 자식들도 아직 제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신지 못해서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자꾸 겪다 보니 마음에 배짱이 생긴 걸까. 어쨌든 걱정으로 내가 나를 옭아매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두 팔을 뻗어 올려 기지개를 켜고 목 운동을 하다 내 몸을 내려다보니 안정적인 뱃살이 보인다. 아아, 나를 지탱하는 것은 배짱이 아니라 뱃살인가 보다.      


나는 바쁜 중에도 이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마당의 국화는 가을에 맞춰 열심히 피었다. 덕분에 이른 한파주의보가 내린 시월의 아침이 국화 향기로 노랗게 눈부시다. 특별히 좋은 일도 특별히 나쁜 일도 없는 다행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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