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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Oct 21. 2022

하늘엔 뭉게구름, 식탁엔 뭉실 수제비

쌀쌀한 시월에 수제비를 먹어요

누군가가 수제비를 먹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쌀쌀한 시월에 먹기 좋은 음식이다. 내 머릿속에서 멸치를 우린 국물에 감자, 호박, 마늘, 파를 넣고 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은 수제비가 냄비 속에서 익어 떠오른다. 수제비에 얽힌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빠의 수제비

내 나이를 왼손 하나 쫙 펴서 말할 수 있던 아주 어릴 때, 아빠가 수제비를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부엌은 신을 신고 내려가야 했고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아빠는 그 연탄아궁이에 냄비를 얹고 물을 끓이셨다. 물이 끓으면 수제비 반죽을 손으로 떼어 넣으셨다. 한 번에 몇 조각만 넣으셨다. 다 익은 수제비 조각이 흰 구름처럼 몽실몽실 떠오르면 건져서 새콤한 초간장을 찍어 입에 넣어주셨다.

입을 ‘아’ 벌리고 있다가 받아먹은 수제비는 따뜻했다. 한 입 씹으면 쫄깃했다. 새콤하고 짭짤한 초간장 맛을 느끼면서 꼭꼭 씹어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아’ 벌리고 받아먹고는 했다. 연탄아궁이가 있던 부뚜막에 언니들과 쪼그리고 앉아서 아빠의 수제비를 받아먹었다. 

외할머니의 수제비

외할머니는 수제비 반죽을 질게 하셨다. 질어서 손으로 뜯어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질척한 반죽을 커다란 나무 주걱에 넓게 펴 붙여서 젓가락으로 쳐내셨다. 빠르게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하셨다. 그러면 주걱에 붙어있던 끈끈한 반죽이 젓가락에 붙으면서 보자기처럼 얇게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끓고 있는 수제비 국물 속으로 퐁 떨어졌다. 

이것도 아주 어릴 때 먹어 본 수제비다. 커서 내가 먹어 본 수제비들은 다 반죽을 국수처럼 덩어리로 해서 손으로 잡고 떼어 내도 반죽이 손에 묻는 일이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쫄깃하긴 해도 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적다. 

흑석동 수제비

나는 대학을 흑석동에서 다녔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동아리 선배를 따라 점심을 먹으러 갔었다. 학교 근처에 있던 분식집인데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선배는 라면 두 그릇을 주문했다.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라면이 한가득 담겨 나왔다. 그릇 안에는 라면과 함께 수제비가 들어 있었다. 라면에 수제비가 들어있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라면 반 수제비 반이었다.

비쩍 마르고 입도 짧던 서울내기인 나는 반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양이 많았다. 그러나 같이 간 선배는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학교 앞에서 먹는 라면은 어느 식당이나 마찬가지로 수제비를 잔뜩 넣어주었다. 라면 하나로는 허기를 달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수제비를 넣어 준 것이다. 한 그릇에 오백 원이었다. 선배는 그날 오백 원짜리 라면을 사주고 학교 옆 상아 다방에 가서 육백 원짜리 커피를 사주었다. 

슬픈 수제비

십여 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중학생이던 큰아이 시험 감독을 갔었다. 학부모들이 학교 도서실에 모여 있었다. 아는 얼굴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도서실이 수런수런 해졌다. '자살했대' '어머, 진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카피로 유명한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였다. 

초롱초롱 이쁜 얼굴의 그녀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가난한 어린 시절 수제비를 많이 먹었다고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수제비 반죽을요, 이렇게 늘여요. 하늘이 보일 만큼 얇게요.’ 손을 들어 수제비 반죽을 늘이는 시늉을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처럼 아이 둘이 있던 여자였다. 가슴이 아팠다. 3층이었던 도서실 창 너머로 보이는 쨍한 단풍이 어릿어릿했다. 

나의 수제비

수제비는 순서가 있는 음식이다. 다른 음식들도 다 만드는 순서가 있지만, 특히 수제비는 그렇다. 된장찌개는 다시로 국물을 내고 된장을 풀고 채소를 넣고 두부를 넣으라고 한다. 그러나 두부를 먼저 넣어도 된장찌개가 된다. 된장에 채소를 다 버무려서 넣고 끓여도 결국은 된장찌개가 된다. 순서가 조금 바뀌어도 만들어지는 음식이다.

그러나 수제비는 그렇지 않다. 일단 멸치를 넣고 국물을 만들어야 한다. 국물이 끓으면 감자를 넣어야 한다. 그리고 반죽을 떼어 넣는다. 반죽을 넣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양파나 호박은 미리 넣으면 물러서 흐물흐물 해지고 맛이 없어진다.      

수제비가 다 익을 때 즈음 양파와 호박을 넣어야 한다. 수제비에 넣는 감자는 두툼해야 맛있는데 양파나 호박처럼 나중에 넣으면 속까지 다 익지 않아 서걱서걱하다. 그러니 정신을 단단히 차려서 잊지 말고 미리 넣어야 한다. 은근 순서에 신경이 쓰이는 음식이다. 

내가 수제비를 처음 만들어 본 것은 결혼한 이후이다. 엄마는 수제비를 해주신 적이 없다. 일곱 식구 분량의 수제비 조각을 떼어 넣는 일은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니 항상 바쁘고 종종걸음이었던 엄마는 수제비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것을 내가 처음 수제비를 만들던 날 냄비 속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으며 깨달았다.

오늘 먹어 볼까, 수제비

요즘은 식당에서 수제비를 사 먹는다. 대부분 바지락으로 국물을 내거나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풀어 얼큰한 것들이 많다. 그런 수제비는 별로 당기지 않는다. 나는 멸치로 국물을 낸 수제비를 좋아한다. 우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지만 진한 멸치 육수로 국물을 하는 식당이 있다. 칼국수 집이긴 해도 수제비도 같은 맛이다. 

이 집은 국물이 아주 진하다. 멸치만 우린 것이 아니고 북어 대가리와 디포리 같은 것들도 넣는다고 한다. 식당 뒤에 아주 커다란 빨간색 고무통이 있는데 그 안에 맛을 내는 비법이 들어 있다고 사장님이 귀띔해준 적이 있다.

음식을 주문하면 보리밥 조금과 열무김치를 준다. 열무김치를 넣고 고추장을 조금 넣어 보리밥을 비벼 먹다 보면 음식이 나온다. 날이 쌀쌀해서 피곤이 잘 풀리지 않는 날 이 집에 가서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을 후룩후룩 먹다 보면 정신이 맑아진다. 한 그릇을 다 먹고 신을 신고 나오면 배가 두둑해져서 허리가 쫙 펴진다. 오늘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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