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였는지 곰곰 생각해 보니 십 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살던 곳 단지 앞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학원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무작정 찾아가 어른도 배울 수 있냐고 물었다. 삼십 대 초반의 눈이 크고 귀여운 얼굴의 원장님은 웃는 얼굴로 성인반 수업은 없지만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수업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와 단둘이 그림을 그렸다. 수채화도 그리고 아크릴화도 그리고 오일 파스텔로도 그렸다. 날이 좋을 때면 호수공원에 가서 꽃을 그리기도 했고 심학산에 가서 그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삶의 어두운 강물을 건너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웃으며 서로 위로하는 사이가 되었다. 비록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지만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안아줄 수 있었다.
두 해를 그렇게 보내고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고 그림 수업을 그만두었지만, 가끔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오늘 일 년 만에 그녀를 만났다.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개인전도 하고 단체전도 하고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그녀는 예전보다 밝은 모습이었다. 나도 그때 비하면 많이 밝아졌다. 최근에 있었던 직장에서의 힘들었던 일을 말하자 그녀는 지금 나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굳이 나를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그만두길 잘했다고 내 편을 들어준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그녀가 말해준다.
“예전에 선생님이 제게 그런 말 해주셨잖아요. 모든 사람에게 웃어줄 필요 없다고요. 그때 학원 열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학부모들이 무리한 부탁을 해도 거절을 못 하고 무조건 웃으면서 다 받아주는 저를 보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자기 자신을 지키라고요. 그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그 말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녀는 거절을 못 해서 어쩔 수 없이 학부모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힘이 들어 눈물을 글썽였었다. 나는 자기 자신의 원칙을 지키라고,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대해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대해 준다는 말을 했었다. 솔직히 그 말은 어긋난 결혼 생활로 마음이 많이 무너져있던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 내가 너무나 힘들어 보였는데, 그냥 웅크리고 있지 않고 나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도 힘을 낼 수 있었다는 말도 했다. 그녀는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림이 너무 좋아 화가의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녔다는 말도 했다.
그때는 고정적인 수입을 위해 미술학원을 하면서 석사과정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니 공부하랴 그림 그리랴 돈 버는 일 하랴 하루하루가 너무나 정신없고 고단해 보였다. 어느 날인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도 했었다. 나는 눈물을 닦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다시 붓을 들어 내게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라고 하면서 그림 속의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저는요, 편한 사람이랑 밥을 먹으면 많이 먹어요, 오늘 진짜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꾸 실없는 말을 하게 돼요. 선생님이랑 있으면 우스운 말들이 자꾸 생각나요.”
“나도 우리 미술 선생님이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농담이 나와요. 나도 선생님 좋아하거든요.”
나도 그녀처럼 가끔 실없는 말을 한다.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사차원 농담도 곧잘 한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일 년 만에 만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앱을 이용해서 사진을 꼼꼼하게 보정을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화가답게 배경까지 아주 꼼꼼하게 사진을 다듬는다. 새로 탄생한 내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하는 말에 나는 깔깔 웃었다.
“더 예뻐졌죠? 실제로도 더 예뻐질 수 있어요. 제발 얼굴 활용 좀 하세요. 옷도 더 이쁜 걸로 입으시고요, 고르기 어려우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예뻐지면 우주의 좋은 기운이 온다니까요. 대충대충 하고 다니면 우주가 알아요.”
깔깔 웃다가 깨달았다. 맞아,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해야 우주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스무 살이나 어린 선생님께 우주의 이치를 깨달았다. 우주의 좋은 기운을 모을 줄 아는 선생님이 진짜 선녀 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