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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y 03. 2022

아싸 퇴근을 꿈꾸며

지난밤 조카와 잠깐 SNS로 대화를 나누었다. 서른 살을 넘긴 조카는 요즘 일이 힘들단다. 재택근무를 하는데도 일이 고돼서 자꾸만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단다. 어제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3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나는 힘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출근할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20대에 근무하던 종합병원의 응급실은 밤마다 피비린내와 술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곳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살려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어서 긴장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동굴처럼 꾸며져 어두침침했다. 유난히 긴 그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갈 때마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결혼 후 첫애를 임신하고 퇴직한 후에도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저절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십 년을 넘게 그랬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도 매일 그만두고 싶었다. 


아이들이 자란 후 다시 취직하기 전,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 여러 해를 망설였다. 그러다가 노인 요양병원에 취직하고 처음 출근한 날 너무 놀랐다. 내가 겪었던, 긴장으로 팽팽한 병원이 아니었다. 이게 병원인가 싶게 느긋한 분위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제 6월이 지나면 5년을 채운다. 그런데 요즘 자꾸 그만두고 싶다. 좀 쉬고 싶다.     


취직 전 누가 그랬다. 요양병원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허무함이 커진다고. 이제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아무리 오늘에 집중해서 살더라도 어제보다 오늘 더 쇠약해지는 사람을 계속 보는 일은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요즘은 기쁜 일로 기분이 좋아져도 잠시뿐이고 금방 가라앉아 버린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30대의 젊은이에게 이유 없이 지치고 힘들다는 얘기를 들을 줄을 몰랐다. 나만 그만두고 싶은 줄 알았다. 서른을 넘긴 팔팔한 녀석도 매일 퇴직하고 싶어 하는 줄 몰랐다. 나만 그만둔 후에 또다시 취직할 일을 걱정하며 출근하는 줄 알았다. 나보다 스물몇 살이자 더 젊은 청년도 그런 걱정을 할지 몰랐다.      


어젯밤 30대의 조카와 50대인 나는 서로 출근하기 싫다고 투덜거리고 그만두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그러다가 조카는 요즘 빵 만들기에 빠져있다며 자신이 만든 빵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내가 쓰는 글에 관해 얘기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다음날 일해야 하니 그만 자자고 하며 마무리했다. 오늘 낮에 그 대화를 다시 살펴보니 씁쓸하면서도 우습다.   

   

농담처럼 조카에게 넌 일을 그만두어도 밥 주는 엄마와 아빠가 있어서 부럽다고 했다. 그 농담에 그림자처럼 길게 매달린 진실은 ‘정말 부럽다’이다. 나는 내 밥벌이를 온전히 내가 해야 하는 나이니까. 이 진실을 조카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녀석도 알고 있을 테니까. 언니에게도 조카의 고민을 말하지 않을 거다. 알아봐야 애면글면할 테니까.     


노래나 한 곡 불러보자 

      

흔들리는 택배 속에서 내 월급 향이 느껴진 거야
스쳐 지나간 건가 뒤돌아보지만 그냥 빈 상자만 보이는 거야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버리는 날엔 괜히 카드값만 생각나는 거야
크게 저질러 볼까 용기 내 보지만 그냥 내 손가락만 떨리는 거야
쓰다가 보면 항상 이렇게 텅텅, 바라만 보던 월급 우우오오아 텅텅텅      

(원곡-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장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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