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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y 05. 2022

어른도 어린이날 선물이 필요해



운전할 때는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어제도 그랬다. 어린이날이라고 아빠가 용돈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의 나이가 아흔이 넘었다는 거다. 빙긋 웃음이 나왔다.

      

내 아이들도 둘 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어린이날이면 선물을 주고 싶다. 작년에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하면서 생색을 냈다. 딸과 아들은 즐거워했다. 올해도 선물을 주었다. 친구들과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아들에게는 용돈을 주었다. 예상치 못한 엄마의 용돈에 아들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딸은 운동화를 사달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어제 딸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로 비눗방울 놀이 세트 해줄까?’ 물었더니 까르르 웃었다. ‘나 어린이 아닌데.’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깜짝 선물에 아이들은 즐거워하고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서 나도 즐거웠다. 그거면 된 거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정해진 날짜에 해야 할 정해진 일들이 많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학교 일정에 맞춰서 소풍이나 운동회를 챙겨야 했고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 날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엄마의 병원 진료 날짜를 챙겨야 한다. 두 달에 한 번씩 신경과와 순환기 내과 예약 날짜가 문자 알림으로 온다.  

    

이것뿐이 아니다. 돈 나가는 날도 정해져 있다. 11일에는 주택대출이자를 내야 하고 20일에는 관리비를 납부해야 하고 25일에는 전기세가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월말에는 현금 대신 사용한 신용카드 대금 결제가 기다리고 있다. 바쁜 일이 생겨 날짜를 놓치게 되면 돈을 더 물어야 하는 낭패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어린이날 선물 같은 깜짝 선물이 생기는 날이 있다. 얼마 전에 만났던 후배가 내게 준 선물도 그렇다. 저녁을 먹고 헤어지면서 쥐여준 종이가방을 집에 와서 풀어보니 비누와 갈색 병이 들어있었다. 병 꼭지를 눌러 뿌려보니 방 안에 상큼한 향이 퍼진다. 어쩐지 집에 오는 내내 차 안에 ’애니시다‘라는 꽃의 향이 풍겨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었다. 이 꽃의 향을 기억하는 것은 엄마 생신에 선물해드린 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자 안에 있던 비누와 스프레이에 이 향이 들어있나 보다.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이란다. 요즘 잠을 깊게 못 잔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자기 전에 베개에 한두 번 뿌린다. 뿌릴 때마다 화장기 없이 맑은 얼굴로 조용히 웃는 후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향기 좋은 노란 꽃을 선물 받고 기뻐하던 엄마 얼굴도 생각난다. 어젯밤 어린이였을 때처럼 푹 잔 것은 후배의 깜짝 선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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