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잠을 잤다는 것만 어렴풋 떠오를 정도로 며칠 동안을 그랬다. 그리고 얼마간 모공에 차오른 기름을 씻어내려고 샤워기 밑에 서있는 중에 들었다.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
난데없는 유치한 질문이 머리에서 한 움큼... 그러나 심각하게 빠져나왔다. 심각함은 날렵하고 날카로운 물줄기에도 아랑곳 않고 견고했다. 덕분에 커다란 질문막에 보호받으며 멍하니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샤워는 전처럼 영감을 받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아니게 됐다. 왕이 된 긴 머리카락 때문이다. 왕은 무릎과 허리, 목관절을 혹사시켰다. 저를 수호하자고 불필요한 훈련과 노동을 추가로 강제했다. 샤워는 이런 끔찍한 정치가 아니었다. 매일 의무적으로 산책시킨 골댕이를 과연 또 씻겨줘야 하는 수준의 형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샤워할 때가 아니라는 이상한 생각까지 방해를 해대니 방황하는 들개를 자주 만난다.
지금 샤워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닌데.
그런 건 좀 안 해도 상관없는 거고.
그럼 지금 뭘 해야 되는데. 뭘 하고 싶은 건데.
스스로 삼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머지 생활이 문제 위로 쌓여 문제는 더욱 무겁고 단단해진다. 삶은 풀 한 포기 없는 거대한 돌산이 되고 나는 석유가 된다. 비로소 얻게 된 긴 머리는 호기심과 인고의 상징이 아닌 정신병 같은 비정상의 표식이 된다.
긴 머리를 좋아하긴 글러먹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안경도 고작 한 달이나 벗고 살았나 도로 걸치고 있다. 내가 너무 꼴 보기 싫다. 맨날 반짝하고 만다. 반짝하고는 수고를 다한 듯 나몰라라 부푸는 우주처럼 반대로 늘어지는 그림자처럼 나도 따라 그런다. 반짝의 여파는 거대한 숙제다. 혼돈이다. 존재란 거듭될수록 혼탁해지는 것이다. 머리 쓸어 넘기고 안경 고쳐 쓰고 코 한번 풀고 뾰루지 만지고 모기 있나 없나 두리번거리고... 염병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남자는 올인원인데.
그럼에도 나는 왜 여태 없지 않고 있을까.
환청이 들린다. 그러면 숨은 왜 쉬냐던 엄마 목소리. 나는 말문이 막혔지만 지금은 지금으로부터 안다. 적어도 나 살자고 숨 쉬는 게 아닌 것을. 차라리 소모되려고 쉰다고. 안 쉬기 위해 쉰다고. 다른 형질로의 변모를 도우려 쉰다고. 공명하려 쉰다고. 공명이 지금은 천지창조가 아닌 고작해야 현상유지처럼 보일지언정 내 몸과 정신은 세상의 무엇들을 부지런히 걸러주고 있잖은가. 생명은 우주의 집진필터인가.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 툭하면 부서지는 믿음에 실망해 영원한 질문 안에서 평화를 느끼는 이상한 사람 속에 나는 있다. 몸을 말리고 새것처럼 밖에 나와 앉았을 때. 노란 띠가 층층이 내려앉은 컵 속을 시계 보듯 하며 범람하는 세월에 희석된 최하층의 맑은 커피물을 마시고 있을 때. 이 순간만큼은 질문 안에서 평화롭다. 평화의 원리를 깨달았으면 의식적으로 거듭하면 될 테지만 누군가 그러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내가 누리던 진짜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집을 나서며
원치 않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에 돌아오면 질문도 더럽다 도망가고 외로이
나는 무슨 수로 살았던가
오랫동안 내팽개치고 이렇게 자라 버리고서는
줄곧 이렇게 있어오고는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내가 원해서 있다.
내 부모가 원해서 있고 세포 하나하나가 원해서 있고 한 점 우주가 통째로 원해서 있다. 세상 무엇을 둘러봐도 내가 있으며 결국 내가 원해서 있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있기를 즐거워하든 두려워하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과거를 기억하든 못하든 언젠가 마땅히 있어야 했으니 나 그때에 있기로 되었으니 이 순간에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중이나 언제나 똑같이 하나다. 그때이자 지금의 내가 사람의 머리로는 드러낼 수 없는 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마음에 앞서 의식보다 앞서 늘 보다 앞서 있기로 했다. 하필 있기로 했으니 있는 것이다. 또다시 왜 있냐고 묻는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질문조차 몽롱하다. 없는 것을 말해야 할 텐데 없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삶의 대부분은 두렵거나 권태롭고 가끔 새로 태어날 때나 흥미롭다. 다만 가깝게는 있기 위해 사랑하고 애썼으니 있다. 그 반복되는 여정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 고통받고 있다. 줄곧 있기 위해 있어왔으니 맨 하는 말이라곤 그분이 없다고 사랑이 없다고 기억이 없다고 기대가 없다고 돈이 없다고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징을 울린다. 내 징은 여전히 (괜한)질문이고 질문은 저 멀리 믿음을 울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얼마나 더 물어야 선택할 수 있을까. 평안할 수 있을까. 새벽을 모르지 않으면서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
하루 종일 혼자 광야로 들어가 싸리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바라며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 생명을 거둬 가소서. 내가 내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하였다. 그러고서 그는 그 나무 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 갑자기 한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어라"하였다. 그래서 일어나 보니 이제 막 불에 구운 빵 하나와 물 한 병이 머리맡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신 다음 다시 누웠는데 여호와의 천사가 또 와서 그를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일어나서 좀 더 먹어라. 네가 갈 길이 너무 멀다." ―열왕기상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