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검사 일정으로 나 역시 이박삼일동안 구색을 달리 해야 했다.
때마침 집안 청소하는 날도 가까워 오고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안방과 안방 화장실을 둘러봤다.
방수 커버 위로 하얀 침대 패드를 깔고 분명 육 개월 전에 빨아 두었을 커다란 이불보를 펼쳐 구스솜을 채워 넣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함께 오시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늘어나면 블록을 부수고 다른 형상을 창조해야 한다.
둘 이상을 맞이한다면 더 많이 부수고 때로는 전부 헐고 새로 짓는 수고도 필요하다.
아니면 아예 부수지 않고 내버려 두든지.
거미줄 앉은 마왕의 성처럼 거기 그대로 두는 방법도 있다.
어디 한 시절 나의 모양뿐인가.
내 몸을 뉘이고 있는 마왕의 성도 그렇다.
마왕의 성뿐인가.
세계의 수많은 겹들이 전부 들썩인다.
엄마는 그새 머리가 많이 자랐지만 나보다는 훨씬 짧았다.
나는 그새 내가 알던 엄마만큼이나 길었다.
긴 머리칼을 두고 엄마는 웬일인지 날 선 말을 하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가 좋은 공기를 마시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봉사마저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게 백신 때문인지도 몰랐다.
인간의 탐욕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제 새벽 다섯 시에 잘 일어나기만 하면 될 거였다.
까짓 거 잠이 안 오면 밤을 새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새벽 세시면 벌떡 일어나던 놈은 언제 또 이모양으로 구색이 달라진 걸까.
그와 별개로 대체 언제까지 이토록 무력하게 휘둘려야 하는가 따위의 철없는 생각들이 우후죽순 일어났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어쩌면 머리 위로, 하나의 거대한 별을 띄우고 있는 터였다.
별은 머리가 길거나 아니면 짧거나, 하얀 옷을 입거나 재색 옷을 입고는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언젠가 보았을 예수나 이름 모를 성인의 이미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들여다봐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비합리적인 그 어떤 생각이든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봤다.
생각감정을 여러 형태로 표출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숨을 고르거나 명상을 하거나 네 가지 질문 따위 하지 않아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은 금세 물러났다.
생각은 이랬다.
수술해 버렸으면 그만이지.
그다음은 스스로에 대해 공부하고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고 감사하며 살면 충분하지 않나.
질병은 진한 성찰의 기회 아닌가.
오래전이라면 마땅히 죽음과 만나야 했겠지만 죽음을 미루려는 행위도 과연 사랑으로 볼 수 있을까.
인간이 쉽게 이동 불가능한 거리를 쇳덩이를 타고 단시간에 왕복하면서 때마다 삶의 흐름에 균열을 내야만 할까.
육 개월마다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꼭 그래야만 하나.
아무래도 오 년간은 검사를 하든 말든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그다음부터가 진짜일 것 같은데.
채혈, 방사선동이원소주사, 조영제, 뼈스캔, CT, MRI... 뭐가 그리도 궁금한 걸까.
뭐가 그리도 두려운 걸까.
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도록 만들고 없는 대로 있지 못하고 당장의 있음을 낭비하며 있지도 않은 미래를 대비하려는 걸까.
나는 그것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검사실 대기의자에 줄줄이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거기에 있지만 그들의 믿음은 어디에 있을까.
이 모습들이 과연 이로운 일이고 사랑일까.
왜 갑자기 사랑이냐면 검사 안내장 가장 밑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어휴 무거워.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양 하나님이라는 치트키에다가 사랑이라는 진리까지 가져다 붙였다.
도대체 둘은 왜 따로 노는 것일까.
혼란스럽다.
소꿉놀이가 너무 진지하다.
너무 진해서 거짓말 같다.
나는 쓴 표정으로 다리를 꼬아 앉았다.
내가 삐뚤어진 건지 세상이 삐뚤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