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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휘재 Oct 11. 2024

쓰고 싶지 않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써봐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말을 잘하려면 말을 많이 듣고 말을 많이 해보면 될 일인지요.


다독과 다작은 고작해야 기술적인 경험치일 것입니다.

자신이 결여되어 있는 글은 커피 체프처럼 주변을 어지럽힐 뿐입니다.


창작의 근원이 생각이 되면 난처해집니다.

생각은 강해질수록 착각이 됩니다.

생각에 앞서 감각이 있습니다.

감각에 앞서 본각이 있습니다.

그것을 앞서 깨닫는 것이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지식과 기술 안에서 방황을 거듭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생각이 앞선 글은 맥이 없어 수명이 짧고 금세 대체됩니다.

새로운 기술과 발견으로 앞서 내놓았던 근거들이 하루아침에 거짓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을 좇으면 반드시 허무가 따릅니다.


생산과 노출이 간편해졌다고 해서 창작의 자세마저 그리 되어서는 또 곤란합니다.

잉여물들이 세상에 혼돈을 부여하고 생명을 질식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을 방황케 했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때문에 작가라면 누구든지 어느 시인처럼 부끄러운 마음을 가슴 한편에 못 박아두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한편 작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불만하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요.





'글'의 모음(ㅡ)이 '길'의 어머니(ㅣ) 가운데 방지턱(+)이 된다면 좋겠지만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삶에 더할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방지턱(丰: 무성하다, 우거지다, 많다, 크다)은 원활한 주행에 방해가 되니까요.


글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작가는 이미 글을 지나쳐 있으니 나몰라라 한다 해도 상관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배가 아프니까 똥을 싸고 쓰레기가 생겼으니 갖다 버리는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그러나 독자는 주인 없는 턱들에 끊임없이 덜컹이거나 정체되거나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체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기관은 뇌도 심장도 아닌 항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올바른 배출을 통해 세상이 원만하도록 기여하는 중재자인 것입니다.


나부터가 정돈되지 않은 불필요한 생각과 글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데다 나의 글은 때때로 비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삶은 왜 나를 글로 내몰아버린 걸까요?

나는 왜 이것을 붙잡고 있는 걸까요?

글보다 진실되고 아름다운 일들이 훨씬 많을 텐데요.


어쩌다 인간은 문자를 발명하게 되었을까요.

나는 그것을 왜 배워야만 했을까요.

진실을 외면하고 서로를 믿지 못한 욕망의 결과는 아닐는지요.

그것이 없던 인간의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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