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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May 24. 2024

괜히 보고 괜한 말하기

한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 해가 진다고 곧장 달이 뜨는 게 아니듯이 살았다. 나는 달이 보이지 않으면 기상이 나빠서 그런 것이라 줄곧 믿었다. 누군가의 무책임한, 흘려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그것이 거짓이어도 그 순간 믿을만했거나 필요했다면 시나브로 굳은살이 되어버린다. 끝내 칭동이라는 정보마저 새로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 역시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달처럼 덜덜거렸다.

산다는 건 믿음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불변의 진리가 있다 해도 그 안에서 낙엽은 또 낙엽이 아닌 낙엽은 어디에서나 불시에 떨어져야만 하고 작년만큼 더욱 길어진 가지에서 피어난 올해의 새싹과 새싹이 아닌 새싹은 또한 다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이름들이 되어야만 한다. 무한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든 날들이자 그의 모든 것이 유한해야 한다.


어느새 한 달 넘도록 매일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었고 그로부터 낯설지 않은 굴레에 빠졌음을 알았다. 역시나 먹는 게 가장 중요하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보는 것 이상으로 음식은 직접적으로 내 안에 진입해 무슨 일이든 실컷 벌이고 만다. 먹는 게 내가 된다. 음식의 성향대로 된다. 말이 되는 걸 먹어야지 얘야. 말이 안 되는 걸 먹으면 말도 안 되니까 말이 많아진다. 그런 음식은 불필요한 말들처럼 섭취를 끊이지 못하게 한다. 말이 될 때까지 감각을 마비시켜 먹게끔 한다. 나는 다시금 맛과 색과 모양에서 벗어나자고 말했다. 한두 번 봐주는 것도 앞으로는 안 되겠다. 자꾸 기어오른다. 기어올라 까불면 스파크와 염증과 그로 인한 뒤틀린 사고와 감정과..., 마음에 나를 둘 수 없게 된다. 마음이 황급히 떠나 그것들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모든 나로부터 단절된 기분이 된다.


어쨌건 당장은 마음이 급한 불을 끄고 집에 돌아온 모양이다. 새벽을 짓누르던 흉통은 이틀 만에 사라졌다. 먹는 것을 고쳤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러자고 마음먹은 것은 흉통 덕분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텅 빈 마음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리가 어두워지고 간단한 일조차 처리하기 무거워진다. 나는 마음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나마 들어지는 걸 들었고 봐지는 걸 봤다. 유튜브에서 스님 되는 이야기를 하나 들어 봤더니 연속극처럼 비슷한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무문관(無門慧)을 지나더니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 기획 다큐까지 어느덧 몰입하고 있었다. 수행을 저렇게 또한 저기서 군대처럼 안 해도 될 텐데, 시작은 필연 고독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본질이랄지―깨달음, 거듭남, 돈오, 신, 빛, 진리, 그 어떤 이름이든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고 그를 통해 세상을 바로 보고 에너지, 관계를 확장하건 말건 나름의, 진실의 법을 마음에 틔워야 한다. 그 법은 누구에게나 가장 흡사하고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출가라는 형식의 방편을 고르면 불필요한 행로가 더해질 것이다. 그러라고 적은 것이 아닌 것을 암송하고 세속의 그것과 똑 닮은 교육을 받고 그룹의 규율을 지키고 따른다. 어쨌건 사람이 모이면 조건도 모여 단단한 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거 우리가 마치 구분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 길 또한 잔뿌리들이니 더듬어가도 해로울 건 없겠지. 그러고 보면 나는 인삼, 더덕 같은 체질은 못 되겠구나.


출가하는 사람도 줄어드는 모양이다. 인구수도 그렇지만 출가하지 않더라도 일상에 녹일 수 있는 방편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또한 정신병원도 활발하고, 마약도 활발하고, 물욕도 활발하고. 극단적이라면 극단적이다. 잘 지내고 싶은데 방법은 모르겠고 바빠 죽겠고 살아온 방편에 익숙하고 도움 되지 않는 도움을 주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 자연히 인내심이 부족하다. 당장의 생활을 버티며 그 속에 또 주변부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탐구, 믿음, 인내심이 아니라 그 반대에 대한 호기심과 인내심이 부족하다. 남들처럼 살아서는 그 인내심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리 없고 생성되는 조건 또한 알 수 없으니 건너뛰고 화끈하게 출가를 택하는지도 모르겠다. 건너뛴 걸 출가를 통해서 챙길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모자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부처는 왕자로 태어났다면서. 그러면 왕자 되는 법부터 고민해 봐야지. 누구나 왕자의 자세를 구하고 왕자의 눈으로 왕자의 삶을 누리며 그 가운데 깨달아야지 왜 쓸데없이 한 달에 두 번 꼬박 머리를 박박 밀고 너른 옷깃이 틀어졌다는둥 트집 잡고 앉아 있어. 순서가 틀렸잖아. 왜 하찮은 문화를 앞세워.


깨닫는다 해도 현실의 모습은 달라질 게 없다. 다만 그 뒤로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요구하는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도 아니게 된다. 길이 없는 길을 걷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동안 의지하고 믿어왔던 모든 필요들이 하나둘 없어진다. 삶의 방편이 실은 군더더기 없이 매우 간단하고 편리해서 그렇다. 나라는 것에 이미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몸 밖으로 나아가 세상과 사람들을 거쳐서 때로는 덧붙거나 떨어져 나가 어떠한 느낌이 어떤 모양새로든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도 물론 더없이 기쁜 일이고 겪어봄직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정신이 세계와 끈끈히 연결되어 삶의 풍요를 느낄 수 있게 되면 온갖 당위들은 사치스럽고 짐스럽다. 호흡 일회마저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그에 따른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낸다. 때문에 눈이란 걸 뜨게 된다면 나밖에 안 보여야 마땅하다. 보이는 게 모두 나로서 존재하고 보이는 만큼 나도 많고 많은 만큼 나와 내가 무수히 구분된다. 주의를 들이다 보면 어지럽고 어려운 게 당연하다.


세상이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손가락이 너무 많고 손톱이 너무 길고 따라서 때도 많이 낀다. 손마디마다 털도 많고 조만간 털에서 무릎이 튀어나오려 하고 튀어나온 무릎에서 엉덩이가 맺힐 것 같다. 최적화시키고 싶다. 그렇다면 무릎과 엉덩이는 잘려나갈 것이고 손톱은 스스로 자르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손가락 몇 개는 실수로 잘려나가고 움직일 필요가 없는 손가락은 절로 썩을 것이다.


다큐 영상 중에 어떤 노스님의 말―과거의 마음도 얻을 바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바가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바가 없다.',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은 가질 것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현재는 지금 계속 지나가고 변하고 있는 상태라 변하고 있는 상태를 어떤 정점을 잡아서 이거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내 것이라 했을 때는 벌써 과거로 가 버렸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과거에도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라. 다만 객관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내가 이 현시점에서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어떻게 전환해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라.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나도 괜히 할 말이 생겨 쓰기 시작한 게 이모양이다. 그러나 태양만큼 나도 있고 태양이 없으면 그만큼 나도 없다. 공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내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들과 나는 별개가 아니다. 지금은 형태와 이름이 너무 많아서 나 또한 그만큼 많아져버린다. 때문에 안다는 것이 불행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진실로 알아야 할 것과 노력해야 될 것은 정작 모른다. 시대가 너무 넓고 많다. 몰라도 되는 게 넘쳐나고 그것들이 나와 세상을 움직이려들고 가치를 부여하려 든다. 안다는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이고 또한 태어난다는 것이 더 이상 이롭지 못한 지경에 있음도 따라서 안다. 역사는 점점 길어지고 빨라진다. 그에 따른 나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나이게 할 수 없으니 더욱 이상한 게 나온다. 과거, 역사, 지식, 그 어떤 이름이든 알려하지 말고 집착하고 간직하고 이어가려 하지 말고 때마다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 그러면 뚜렷해진다. 이어질 건 생명뿐이다. 그리고 생명이 끊이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빛과 공기를 앞서 말했으니 그것들에 할당량을 태어날 때 정해주면 시한부처럼 덜 어리석게 될까. 언제 어떻게 죽어서 땅과 바다와 하늘의 무엇으로 떠돌다가 어떤 식으로 규합되어 의식이 작동하고 멈추고 또 무엇에 편입되거나 말거나 분열한댔다가 만댔다가 다시 흩어지거나 말거나... 무엇으로 무엇으로 거듭되는 아주 거대하고 느린 심박 같은 생사진동이, 그로부터 느껴지는 시간이, 공간이, 회오리바람이 이해가 되어야 좀 달라질까.


? 요즘 세상엔 이런 경험이 잘 없다. 마치 놀이터에 내가 있고 올 사람은 오고 안 올 사람은 안 오고 안 와도 상관이 없고, 보기 싫은 사람과 맞닥뜨려도 어쩔 수 없고, 그런 순간들에서의 기지, 퀘스트, 이벤트에서 삶을 통찰할 시간이 없다. 끽해야 그것을 잠시 느끼고 싶어 여행이나 떠난다. 그조차 딱.딱.딱.딱. 일상이 여행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미리 정해두고 틀리지 않게 살려니 아무 설렘도 없지. 모든 것을 정해놨으니 하나 빗나가면 전부가 지옥이 되는 거지. 지옥에서는 해냈다는, 오늘도 어떻게 지나갔다는 안도감 밖에 없지. 내가 느끼는 바는 과거는 단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고 미래는 언제에나 존재한다. 모든 그룹이 현재다.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과거도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흙을 파헤치는 것과 흙을 덮는 것이다. 어느 것도 과거이고 어느 것도 미래다. 파헤치고 덮는 삽질만이 현재라는 순간을 만든다. 과거와 미래는 늘 한자리에 있다. 존재가 나무라면 과거는, 과거라는 경험은 저 멀리 뻗은 나의 뭇가지에서 나온 이파리들이다. 그것을 취할 때 그것은 과거이지만 동시에 새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한 굴레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먼저 나중 지금도 그렇다. 다만 하나의 풀에서 뒤엉켜 놀고 있다. 굳이 미래라는 것을 구분 짓자면 볼풀장이 하나 더 늘어난 상태가 아닌가 한다. 순환고리의 모습이 있다고 치면 과연 거기서 어디가 과거고 어디가 미래냐. 특정 지점부터 그것이 시작된 게 아니다. 모든 지점에서 시작된다. 하나, 전체, 일부가 관찰되고 느꼈다 해서 그 지점이 진실이 아닌 것이다.


가질 것이 없으니 가지지 말라,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말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이미 누구나 기나긴 누적된 욕망으로써 필요 이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각으로 시작되면 좋겠다. 우리는 너무 많아서 더 많이 필요하므로 아프다. 때문에 골치의 기능이 발달해야만 했는데 이제는 그 골치마저 아플 지경이다. 슬슬 이다음 과정이 드러나야 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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