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7일 (월)
이렇게 찾아온 너, 속도위반이야.
2016년 1월, 네가 엄마에게 찾아오기 얼마 전 나는 고작 28살이 되었단다. 그동안 나는 여고생에서 여대생으로, 여대생으로 직장인으로, 직장인에서 아내로 스스로의 신분을 변화시켜왔어. 누구나 그렇듯, 그 모든 게 그냥 된 건 아니었어.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설명이 필요했지. 그게 성적이건, 자기소개서이건, 면접이건. 어쩌면 네 아빠를 꼬실 때에도. (물론, 엄마도 누군가의 딸로 태어날 때는 존재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어.)
하지만 무언가가 되기 전 이렇게 스스로의 자격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은 처음이야. 아직 세상의 이름도 갖지 못한 너이지만, 네 심장이 뛰고 있음에 엄마는 많은 생각 든다.
엄마가 걱정이 되는 이유는 아직 너에게 세상을 가르쳐 줄 만큼, 엄마가 많은 세상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이유는 엄마가 세상을 알아가는 데 너무 게을렀고, 너무 용기가 없었으며, 언제나 미뤄두었기 때문이야. 그런 준비되지 못한 나에게 네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와 준 건 엄연한 속도위반이란다. (사람들은 다른 의미의 '속도위반'이라는 말을 쓰곤 하거든.) 고작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최고급 두 발 자전거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TV를 보면, 책을 보면 세상엔 너무나 멋진 아빠, 엄마들이 많더라. 아빠, 엄마는 망아지 같은 아이들이 제풀 지칠 때까지 뛰어놀아도 좋은 너른 마당을 가진 만큼 부자도 아냐. 아빠, 엄마는 '공부 따위 중요하지 않다'며 너와 함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여행을 떠날 만큼 용기 있지 않아. 이건 좀 더 충격적일 텐데, 너희 아빠는 네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 다리몽둥이를 뿐 질러 버리겠다(이런 일상적 표현은 문제가 있지만)는 어마 무시한 말도 했단다. 이번 주에 네 다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던데, 이 말을 듣고 흠칫 나오려던 다리가 움추러 들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엄마도 오토바이에서 만큼은 아빠 의견에 반대할 생각이 없노라고 말했어. 이렇게 아빠, 엄마는 교양있고 매사 나이스 한 사람들도 아니란다.
그런데 오늘 아침, 7시가 채 되기 전 눈을 뜬 엄마는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들기 시작하는 빛을 보면서 언젠가 이 침대에 함께 누워 너에게 '해'라는 말을 가르쳐주는 상상을 했어. 오늘 오후에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촉촉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창밖을 보며 나는 너의 하얗고 오동통한 손에 비를 맞히는 그런 상상을 한다. 여우비, 이슬비, 작달비 그 많은 종류의 비를 다 알려주려면 우리는 참 밖으로 수시로 나가야겠다. 그렇지?
이런 것도 엄마의 자격이라 한다면
아직 갓 심장이 뛰기 시작한 너를 두고 해주고 싶은 일이 참 많아지는 것,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의 것들이 늘어나는 것, 이런 호기심조차 '엄마의 자격'이라고 네가 이야기해준다면 참 좋겠다.
그리고 고마워. 이런 부족한 나에게 찾아와 줘서. 내가 살아왔던 세상처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가 너에게 줄 것을 의심하지 않고, 나라는 몸속에 네 온몸을 눕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어서.
아가,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