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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직 Sep 05. 2019

아플 수 있다니 너무 좋다

엄마 아프기 법칙: 시간은 확보하고, 책임감은 덜어내기



장장 18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남편과 서호주의 도시 '퍼스'에 도착했다. 내팽겨치듯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자마자,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덥혀져 올라오는 열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내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몸살'이란 녀석이 호텔방에 숨어 나를 맞기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시기적절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씻을 기운도 없었기에 엉거주춤 두 발은 침대 밖으로 내어놓고, 나머지 몸은 침대 위로 웅숭그린 채 남편에게 말했다.




 나, 열 나. 근데... 아플 수 있다니, 너무 좋다.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출산을 했는데도 아이를 낳고 나니 툭하면 아팠다. 특히, 몸살이 잦았다.


준이가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어느 새벽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열이 오르자, 지구의 원심력을 내 작은 몸뚱아리 하나로 감당하는 것 마냥 자꾸만 몸이 가라앉았다.


어김없이 새벽 2시가 되자 아기 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에게 분유라도 먹여달라고 부탁이라도 할껄. 당시, 나는 한창 모유수유에 욕심을 내고 있을 때라, 아이에게 밥을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나뿐이라는 대쪽같은 책임감에 목을 매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거실 한 켠에서 아기 준이는 본능적이고도 맹목적으로 내 젖을 쥐어 빨고 있었다. 아이에게 오롯이, 하지만 온전할 리 없이 축 쳐진 양쪽 젖을 내준 채 창밖을 보는 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몸이 무겁고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내가 아파서 운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 밤이 길고 지난했으며, 사무치게 외롭고, 비할 바 없이 서러워서였다.


아이가 두돌 무렵에도 내가 크게 아픈 적이 있다. 기관지는 멀쩡한데도 열이 40도가 넘게 오르고 누군가에게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한창 독감이 유행하던 때라 퇴근 후, 병원에 찾아 독감 검사를 했는데 검사 결과 독감은 아니였다.


주말이 되었지만 남편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 경주에 내려가고, 나 홀로 집에서 준이를 돌보았다. '준이와 하루종일 집에서 놀았다'는 사실은 정확한데, 그 날 내가 아이와 무얼 먹고, 무얼 하고 놀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혼미한 상태였던 것이다.


저녁이 되어 병원에 다시 물어보니, 극초기에 검사를 해서 독감이라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증상상 독감이 맞을 것이란다. 그런데 '이미 40도가 넘는 고열을 4일째 견뎌낸 뒤라, 이제는 타미플루를 먹어도 소용이 없으니 그냥 버티면 내일부터는 나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쿨하다고? 여하튼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거짓말처럼 몸을 회복했다.


머리 한번 뉘일 틈 없이 맨 몸으로 무식하게 독감을 이겨낸 것이다.





아프려면 시간은 확보하고, 책임감은 덜어내야 한다.



그걸 못해서 많이 울었다. 어떤 날은 물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이유로, 시간이 없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쉬지 못했다. 어떤 날은 누군가에(남편일지라도) 온전히 하루종일 아이를 맡기는 것이 맘이 편치 않아 스스로 쉬기를 거부했다.


그러다 호주로 떠나와, 아이를 포함한 나의 일상과 8000km가 넘는 물리적 거리를 두고 나서야 비로소 자발적으로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날 이후로도 나는 호주 여행 내내 미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내게 아플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 말하자면 내가 침대에 몸을 뉘이고자 하면 나를 기꺼이 받아 줄 시간과 공간이 용인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흐르는 시간에 날 내팽겨쳐 두지 않고 아플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감에 온전하고 충실하게 몰두할 수 있는 '극한의 주체적인 경험'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주체적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나니 다시는 몸살을 겪을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후로도 자주 앓고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아프기, 그건 확실히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여행의 묘미였다.


퍼스 숙소에서 바라본 스완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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