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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31. 2020

#84 회사 때려치우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만

언젠가부터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숨쉬기, 잠자기, 밥 먹기 같이 기본적 욕구 충족뿐이었다. 회사 일도 자발적으로 못했다. 시키는 일만 했고 하기 싫어서 억지로 했다. 늘 그렇듯이 하기 싫어서 하는 일은 능률도 안 오르고 결과물도 안 좋다.


이런 비자발적 인간인 내가 올해 자발적으로 퇴사를 했다. 몸이 안 좋아져서 퇴사 결심을 한 것도 있지만, 회사에서 하는 일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실업 급여나 받으며, 1년 정도 놀고먹을라 했더니 자발적 퇴사는 수급 대상이 아니란다. 퇴직금을 손에 쥐고 나니, 집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라고 전화가 왔다. 그렇게 퇴직금은 내 손을 잠깐 스치고 집주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를 관두고 나니 은행에서도 전화가 왔다. 대기업 다니는 손주부는 믿을 수 있어도, 작가 손주부는 믿을 수 없으니 대출을 상환하란다.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사표내고 나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함이 밀려왔다. 남들은 아내가 공무원이라서 아내 빽 믿고 호기롭게 관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니 반박하지 않았다. 아내에겐 사업을 할 거라며 있는 똥폼은 다 잡고 나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경제는 얼어붙을 때로 붙은 상태였다. 매달 줄어가는 잔고를 보면서 조바심에 재취업을 하고자 했으나 재취업하기도 쉽지 않았다. 내 나이가 실무자로 쓰기엔 너무 많고 관리자로 쓰기엔 너무 어린 어정쩡한 나이였나 보다. 그리고 기존 직장에서 받던 월급 때문에 대부분의 회사들은 부담스러워했다. 가끔씩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 오는 곳은 채용을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좋은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지 궁금해서 부른 것 같았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남들보다 무엇을 잘하는지 쭉 적어보았다. 적다 보니 별로 쓸만한 기술은 없었다. 영어를 잘하긴 하지만, 교포보단 못한다. 요즘엔 네이티브도 너무 많아서 박봉에 시달린다. 해외 영업을 14년간 했지만, 담배회사 영업이어서 다른 회사에선 필요 없단다. 사표 던져도 내 멋대로 살 수 있다는 근자감에 뛰쳐나왔는데, 회사 밖은 말 그대로 정글이었다.


나는 그간 대기업이라는 식물원 안에서 자란 연약한 화초였다. 식물원 보호하에 영양제 맞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밖에 있는 나무들보다 빨리 자라니깐 내가 잘라서 그런 것으로 착각했다. 유리가 사라지고 추위와 비바람이 몰려오자 모든 것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정쩡한 나이에 재취업도 안되고 좌절하고 있던 중에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나 글을 못쓰게 막아놓은 것이 신선했다. 예전에 써 놓았던 육아휴직 관련 글을 별 기대 없이 보냈는데, 편집자 분이 재미있게 읽으셨는지 한 번에 붙여 주셨다. 나 같은 사람이 쓴 글도 작가로 붙여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브런치를 얕잡아 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정말 운이 좋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브런치 글을 쓴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네이버 블로그에 글이라도 썼으면 광고비라도 나왔을 텐데 아무런 돈도 안 나오는 브런치에 뭔가에 홀린 듯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리고 나의 허접한 글에 한 분 두 분씩 공감해 주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글에 공감받는 독자들을 보며 나 자신도 공감받기 시작했다. 구독자가 조금씩 늘어갈 때 즈음 갑자기 글을 쓰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슬럼프가 길어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일본 작가 사노 요코 누나의 "죽는 게 뭐라고"를 읽고 깨달음이 왔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너무 잘 쓰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냥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 똑같지 않고 개성 있게 생겼듯이 생긴 대로 글을 쓰면 개성 있는 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올렸다. 정말 아니다 싶은 글들은 브런치에 올렸다가 다시 내리기도 했지만, 가급적이면 맘 편히 글을 써서 매일 올렸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인터넷 주소가 141인 것을 보니 6개월 동안 벌써 141편의 글을 썼나 보다.


매일 글을 쓰니 요즘엔 쌀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받던 월급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첫 월급을 받았을 때만큼 기분이 참 좋았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성장해 나가는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좋다. 언제 까지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 힘이 없어져 키보드 버튼을 못 누르게 되는 날까지는 쓰지 않을까 싶다.


이미지 출처 :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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