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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Nov 16. 2020

#54 착한 아이 콤플렉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아내는 너무 착하다. 13년을 같이 살면서 잔소리를 하거나 부탁을 거절한 적이 거의 없다. 친구들은 결혼하고 나면,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 아내에게 혼난다고 했다. 예컨대,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다던지, 서서 오줌을 눠서 변기를 더럽게 만든다든지, 카톡 메시지를 읽고 답변을 바로 안 한다든지 하면 아내로부터 혼난다고 했다. 친구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데 잔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아내는 내게만 착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도 착한 사람이다. 직장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본인이 혼자서 다 떠맡아한다. 남들이 다 칼퇴근할 때 야근을 한다. 주말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컴퓨터로 잔업을 한다. 남들이 보면 힘들기로 악명 높은 S전자라도 다니는지 아는데, 아내는 지금 나라의 녹을 먹고 있다.  


아내가 자신의 느낌이나 욕구를 너무 억압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늘 걱정이 된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맞춰준다는 것이고, 맞춰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침부터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심각하게 토론하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산타할아버지는 사실 아빠, 엄마라고 말했다는데 둘째 딸아이는 믿을 수 없다며, 언니에게 말한다.


"내 생각에 산타 할아버지는 분명히 있어. 왜냐하면 엄마, 아빠는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코 골면서 자기 때문에 중간에 일어나서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선물을 놓을 리 없어!"


"응,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해! 산타 할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은 5만 원이 넘는 비싼 것들인데, 짠돌이 아빠가 그 비싼 것을 샀을 리가 없어!"


'이것들이 보자 보자하니깐 누굴 보자기로 아나! 산타는 세상에 없어! 산타는 사실 아빠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소중한 동심을 위해 잠시 참아 본다. 그리고 갑자기 머릿속에 크리스마스 노래 한곡이 떠올랐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내 감정이 슬프면 울어야 하는데, 울면 안 된다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내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착한 여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여러 매체를 통해 '착한 아이'를 양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한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감정 표현을 잘 할 수 있을까? 착한 아이들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세뇌되어 왔는데 어떻게 타인보다 내 감정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 울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들장미 소녀 캔디'도 마찬가지다. 슬플 때 울지 않고 버티다 보면, 나중에 나이 먹고 늙어서 우울증에 시달릴 것 같다. 그리고 캔디는 착하게 살았더니, 잘생기고 멋진, 긴 머리의 테리우스(한때 나도 테리우스 머리를 했다.)를 수잔나에게 뺏기고 만다.


다른 여자에게 떠날 거면서 왜 캔디 가슴 설레게 하는 거니?


현실로 돌아와서, 아내가 이제 더 이상 캔디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눈치 보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 (남편, 시댁 식구, 아이들, 직장동료)보다 자기를 더 아끼고 위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아내의 테리우스는 한때 길었던 머리를 '싹둑' 자르고 당신 뒤에 늘 서있을 테니깐.  



Photos from 들장미 소녀 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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