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나뭇가지 위 울긋불긋하던 낙엽이 드디어 땅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달이다. 단풍을 눈으로 즐기는 어른들의 단풍놀이는 10월이 피크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단풍잎이 땅으로 떨어져, 기어코 손으로 만져보고, 밟아보고, 냄새를 맡아볼 수 있는 11월. 아이들의 단풍놀이는 그때 시작이다.
가장 먼저는 낙엽 치우기.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은 뭐든지 해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다. 갈퀴를 손에 쥐어주고 낙엽을 쓸게 했다. 쓸어 모은 낙엽을 버릴 수 있도록 봉투에 꾹꾹 눌러 담는 일도 함께 했다. 몇 번 하다 관두게 하지 않고 적은 양이지만 할당량을 주어 책임감 있게 마치게 했다. 예전에 이웃 친구를 보니 아예 달러라마에서 아이들용 갈퀴를 사서 손에 쥐어주니 더 편해 보였다.
낙엽을 청소하면서 한쪽으로 쌓아 둔 낙엽 더미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좋아하는 둘째에게 안성맞춤이다. 바스락 거리고 푹신한 낙엽 더미 위로 뛰어내리면 마른 낙엽 특유의 냄새가 난다. 아이들의 오감을 자극해주고, 무엇보다 늘 어딘가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주는 고마운 놀이다.
어느 날은 날이 맑아 햇살은 내리쬐고, 바람은 살랑 딱 좋게 불어 나무 밑으로 낙엽비가 내렸다. 탄성을 지르며 낙엽비를 맞으러 뛰어가는 아이들. 비가 자주 오고 흐린 캐나다의 가을에 선물 같이 예쁜 날이었다. 우리가 매일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포착할 수 있었던 순간이지 싶다.
낙엽뿐인가. 부러져 떨어진 잔가지들, 솔방울, 은행, 도토리들. 밖으로만 나가면 자연이 주는 놀잇감이 날마다 새로운 11월이다. 공짜 선물 같은 놀잇감들은 훌륭한 수학 조작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참 분류하기와 패턴 만들기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바구니 하나 쥐어주고 마음껏 자연물을 골라 담게 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색깔별로, 종류별로, 모양별로, 크기별로 분류하는 것이다. 낙엽-낙엽-나뭇가지-낙엽-낙엽-나뭇가지 등 패턴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또 모아놓은 자연물 중에 가장 예쁜 것만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더니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쏟아지는 다양한 미술활동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가장 간단하지만 미술을 좋아하는 첫째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낙엽 위에 종이를 두고 색연필로 문질러서 모양을 내는 활동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이파리 각 부분의 명칭을 말해보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눈을 감고 만져본 뒤, 가장 많이 튀어나온 잎을 몇 개 골라 색깔별로 문질렀더니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바깥에 무작정 나가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놀이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둘째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모아 루돌프가 되기도 했고, 첫째는 학교에서 배웠다며 비버 댐을 만들기도 했다. 비버는 캐나다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물 중 하나인데,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물 위에 댐을 세워 집을 만든단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배운 동생도 온라인 스쿨링 과학시간에 비버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반짝였다.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다양한 경험이 아이에게 학습동기를 불러일으키고 많이 보고 알수록 더 많은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 11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다. 한국의 현충일 같은 날이다. 올해 리멤버런스 데이에는 아이와 함께 꼭 참전용사들이 묻혀있는 묘지에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탓에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구글에 veteran cemetory near me라고 검색해 보면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살고 있는 지역의 참전용사 묘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신 올해는 둘째네 선생님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 바로 Negotiating(협상)에 대해 배우기. 아직 영어 어휘가 제한적인 둘째가 fought(fight의 과거형)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것에서 시작했다. 선생님이 두 나라가 서로 동의할 수 없는 문제로 전쟁이 났고, 나라의 군인들이 각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이끌어나가셨다.
교사: 싸움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까?
딸:...
교사: 여기 바나나가 하나밖에 없지? 근데 이걸 나도 먹고 싶고 너도 먹고 싶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자, 나한테 바나나 먹어도 되냐고 한 번 물어봐봐.
딸: 나 그 바나나 먹어도 돼?
교사: 글쎄. 나도 지금 배가 고픈데. 내가 이만~~ 큼 먹을게, 너는 요만큼만 먹을래?
딸:...
교사: 어떻게 하면 우리 둘 다 해피할 수 있을까?
딸: 잘라요.
교사: 그러면 되겠네! 반으로 잘라서 나눠먹으면 되겠네! 자, 봐. 지금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얼 했지?
딸: 말했어요.
교사: 맞아! 우리가 대화를 했지. 이걸 어려운 말로 Negotiating(협상)이라고 해. 문제를 해결하려면 싸우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니고시에이팅을 해야 해. 그런데 그걸 못해서 전쟁이 났어. 많은 사람이 아프고 다치고 죽어야 했어. 슬픈 일이지?
온라인 스쿨링을 시작하면서 부모로서 참 어려운 점도 많지만, 이렇게나 교육적인 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배울 수 있는 것은 참 좋은 점 같다. 비록 이 멋진 대화 끝에, 우리 둘째가 '근데 그거 알아? 나 사실 바나나 안 좋아해.'라고 말해서 선생님들이 모두 빵 터졌지만 말이다. ㅎㅎ
그래도 그 날 이후로 약간의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자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부모로서 어떻게 훈육해야 할지 참 고민스러웠는데 협상을 시도하게끔 문제 해결 방향을 정해줄 수 있었다. 요즘에는 동생이 말을 안들을 때마다 "Okay, here is a deal. 내가 이만큼 해 줄테니까 너도 이만큼 해." 하며 첫째가 동생에게 협상을 시작하기도 한다. 리멤버런스 데이에 배우기 딱 좋은 사회적인 기술(Social skills)이자, 바람직한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리멤버런스 데이가 끝나면 이 곳에선 대부분 집집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민다.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했다. 하나 둘 셋! 하고 트리에 불을 켜자, 와! 하고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함성에 나까지 행복해진다.
이제 길고 긴 캐나다의 겨울이 정말로 시작되는 것 같다. 비도 점점 자주 오고, 점점 추워지고 있다. 그리고 비는 곧 눈으로 바뀔 테다. 그래도 여전히, 날씨에 맞게 잘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캐나다 모든 초등학교에서 그렇듯 눈이 오나 바람이 오나 밖으로 나가 바깥공기를 마시고, 자연 그대로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려 한다. 겨울을 맞이하며 엄마가 마음을 조금 더 단단히 먹어본다. 부지런히 나가자!
(+)
밴쿠버 초등학교에서 파견 근무할 때, 학교 행사에 초대되어 우연히 만나게 된 한국 전쟁에서 싸웠던 캐네디언 참전용사 한 분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리멤버런스 데이를 대하는 그들의 교육을 보고 참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관련 글은 아래 링크에)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어디서나 쉽게 구하던 파피(Poppy 이 곳에서 참전 용사를 추모하는 방식으로, 가슴에 다는 양귀비 꽃)마저 흔히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https://brunch.co.kr/@ilae9213/25
[이렇게 양육하는 이유, 나름의 양육/교육철학이 담겨 있는 필자의 브런치 북]
https://brunch.co.kr/brunchbook/canada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