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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눈이 내리면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

by 조아

부산에는 웬만해서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30년 넘게 부산에서 살았지만 눈은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많지 않다. 날씨 뉴스를 볼 때 전국에 대설특보가 내린다는 내용을 들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대설특보가 내린다 한들 부산이랑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혜택 같지 않은 혜택을 받으며 살다 보니 눈에 대한 감각도 무디어지고 눈에 대한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경기도 북부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할 때 겨울만 되는 하루 종일 눈만 치운 날도 많았고 치워도 치워도 그대로인 눈을 보면서 분노의 감정이 쌓였다. 특히 눈이 내리면 "쓰레기 치우러 가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눈은 치워야 하는 대상이며 절대 쌓이면 안 되었다. 꽁꽁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하루 종일 눈과의 싸움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되어 잠들기 일쑤였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눈을 싫어했었다. 홋카이도의 순백을 만나기 전까지 눈을 극혐 했지만 매년 홋카이도 여행을 통해 순백의 눈이 가진 에너지에 동화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눈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고, 지워야 하는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득뽀득하는 소리는 내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청량감 넘치는 소리였다.



하지만 눈이 내리면 긴장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물론 내가 활동하는 지역은 거의 눈이 오지 않기에 무감각해지기도 했지만, 타지방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면 대설특보에 대한 감각의 폭을 넓힌다. 특히 내린 눈이 녹아 빙판길이 될 수 있기에, 햇빛이 들지 않은 음지를 다닐 때면 조심히 움직였고 운전할 때는 블랙아이스를 밟지 않기 위해 긴장했다.



금요일 오전, 한 주의 업무를 마감하는 시간이라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아내의 메시지를 확인하니 하얗게 눈이 쌓인 거리와 눈 내리는 영상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이게 무슨 일인가 했지만 잠시 건물 안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오니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부산에 눈이 내리다니, 잠시 내리고 말겠지 생각했지만 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다.


부산에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혹시 눈이 쌓여 도로가 통제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잠깐 앞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던 이유는 낙동강 근처에 있어 그런 것 같고, 다른 지역에는 잠깐 내리고 그치거나 아예 눈이 내리지 않은 곳도 있었다. 하지만 안전문자를 보니 부산 전 지역에 조금이나마 눈이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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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작년 2월쯤에서 아내와 여행을 다녀오다 대구에는 눈이 왔는데 부산에 다다를수록 눈이 점점 보이지 않았고, 부산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니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부산의 위엄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부산은 눈과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며, 이렇기에 몇 센티미터의 눈만 쌓여도 대란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확하지 않지만 97년도로 기억하는데 바닥에 쌓일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려 산 지형이라 오르막길이 많은 부산의 도로망이 일제히 멈추는 교통 대란이 일어났다. 한 터널에는 차가 움직이지 못해 차를 그대로 버리고 도보로 움직이는 광경을 보고 몇 센티미터의 눈도 제설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부산에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내린 눈은 쌓일 겨를도 없이 잠시 내리고 녹아 버려 교통대란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겨울에는 항상 모든 차에 동계 타이어를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홋카이도와 사뭇 다른 부산의 일상을 보면서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느꼈다. 물론 눈이 오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부산에서 30년 넘게 살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눈은 축복으로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부산에서 눈다운 눈을 봐서 기분이 좋다. 잠시 내리고 녹아버렸지만 내 눈으로 그 실물과 형체를 보았다는 것이 기념하기 충분한 사건이다. 아이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서운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눈이 쌓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느낀다. 눈이 내릴 때도 혹시 눈이 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했기에 눈 내리는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부산 사람으로 항상 눈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 상황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눈과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눈이 내려 신기할 정도로 들뜬 마음이지만, 어느새 사라진 눈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항상 대응책을 강구하고 실제 상황에서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가 정말 중요함을 느꼈다. 만약 오늘 눈이 내려 도로에 쌓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하기 때문이다.


부산에 눈이 내린다면 낭만으로 가득 차기보다는 혼란과 위기의식으로 채워지는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눈을 볼 일이 없는 부산에서 눈에 대한 대응책을 항시 구비한다는 것도 참 생산성 없는 일이겠지만, 만에 하나 눈이 내리면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느낀다. 눈을 거의 볼 수 없는 부산에 살면서 내리는 눈을 본 신기한 체험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음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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