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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22. 2023

고구려 생활 문화사 연구

강인한 생존 본능으로 무장했던 고구려인

한 나라의 생활 문화에 대한 연구는 보통 기후와 환경적 요인을 기반으로 시작한다. 마치 적도 인근에 위치한 동남아 지역 나라와 북극 인근에 위치한 나라의 생활 문화가 다른 것처럼 기후와 환경적 요인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인접해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백제와 신라의 사료를 통해 고구려의 것을 추정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도 고구려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생활 문화 속에서 의식주는 근간을 이루며 흔히 먹고사는 문제를 결정한다.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대부분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인 제기이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사용했던 토기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맥적’이라는 고구려만의 요리가 있었는데 맥족의 구이로 풀이되는 만큼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요리법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사냥, 채집, 약탈, 공납 등을 통해 식량을 조달했지만, 장수왕 때 평양 천도를 통해 대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면서 농경 기술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는 만주지역의 고상 창고인 ‘옥미창(옥수수창고)’가 고구려 고분 벽화 속에서 보이는 고구려의 부경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척박하고 추운 북방의 겨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돌’이라는 한민족만의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였고 취사에도 활용하는 지혜를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유적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 속에 부뚜막에서도 고구려의 식문화를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인이 먹었던 음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사용한 토기와 같은 도구를 통해 그들의 식문화를 추정할 수 있는데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발견된 청동솥은 북방 유목 민족이 사용한 도구로 이동 중 요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취사도구이다.


https://brunch.co.kr/@ilikebook/221

 

고구려의 의복과 관련된 것은 다양한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상의는 저고리, 하의는 궁고라는 바지를 입거나 주름치마를 입은 무용총, 각저총의 벽화가 남아 있어서 고구려 당시 그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다. 특히 궁고와 주름치마는 말을 탈 때 편한 복장으로 고구려인의 의복 속에서 기마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냥하는 모습과 수박희 벽화는 생활 속의 군사 훈련인 사냥과 무예를 연마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힘을 키운 그들의 일상을 볼 수 있게 한다.


 국내성이었던 중국 집안 시 인근과 평양 인근 지역에 100여 기 이상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는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고구려로 돌아가 당시 고구려인의 모습을 직접 보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 생생한 활동 모습과 자세한 묘사를 통해 고구려인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고분이 도굴되거나 훼손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어 사진으로 봐야만 할 수 있는 미래가 걱정되기도 한다.


 강하고 거친 모습으로 상상되는 고구려인은 실제 섬세하고 화려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착용한 ‘절풍’이라는 모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 깃털을 이용해 화려한 장식을 해서 자신을 두각 시켰다. 전장을 호령하는 장수의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이 있는 모습이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또한 ‘조우관’이라고 하는 새 깃형 관모 장식은 우즈베키스탄 벽화에서 있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을 통해 생생히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깃털 장식은 새를 숭배하는 풍토를 넘어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고구려만의 스타일이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생활 풍습 중 하나인 ‘데릴 사위제’는 당시 북방민족의 관념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도 만주지역에서는 처음부터 신부 값을 치르고 처가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처럼 당시 고구려에서도 여자는 재물과 같이 여기었다. 그래서 사위가 처가에서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함으로 값을 지불하고 처가에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겨질 때까지 살다가 독립했다.


 또한 비슷한 의미로 ‘형사취수제’를 통해 이미 값을 지불해 얻은 여성을 자신의 가문 속에 있도록 하여 가문의 보존하고 지키려는 고구려인의 관념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이 갑자기 죽자 왕비인 우 씨가 둘째 동생 연우와 결혼하고 신성왕이 즉위한 것으로 보아 지배층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돌궐, 흉노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도 형사취수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고구려인의 생활 문화를 통해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알 수 있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기 어려웠지만 개간을 하며 땅 위에 있는 곡식 저장 창고인 부경을 사용하였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는 난방 시스템인 온돌을 통해 취사까지 가능한 부뚜막을 생활 속에서 적용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말과 밀접하게 연결된 기마민족으로 생활 속에서 말타기에 불편하지 않은 의복을 입음으로 기마민족의 DNA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고구려의 생활 문화를 통해 강인한 생명력과 생존 본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https://brunch.co.kr/@ilikebook/238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강인한 생존본능으로 무장한 고구려인은 항상 자신이 기마민족임을 잊지 않았고 살기 위해 이동한 어떤 곳에서도 적응하여 뿌리내렸다. 먀오족 전통복장에 남아 있는 고구려인의 의복을 통해 강인한 생존 본능이 찾아볼 수 있으며,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라는 말을 이 흔적을 통해 고구려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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