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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21.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연산군일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사랑받지 못한 비정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최고의 군주 후보에 오르는 성종은 항상 세종대왕에 밀려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조선왕조 최악의 왕 연산군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종에 그의 아들이 난폭하고 군주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연산군이 아니면 후사를 이를 적임자가 없었기에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을 싸 죽인 일이다. 유교정치의 백미를 보였던 아버지 옆에서 대간들에 의해 자신이 하려고 하는 대로 하지 못한 것을 익히 보아왔던 연산군이 대신들을 향한 무언의 경고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연산은 군약신강의 유교정치보다는 왕의 뜻대로 움직이는 왕권 중심의 세상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연산군 하면 폭군이라는 수식어가 따르는데 그의 재위 기간에 죽어나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부관참시’라고 하여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극악무도의 형벌을 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부관참시’도 훗날 연산군 폭정의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방법이 되었는데 국문 시 주동자를 색출할 때 이미 죽은 사람으로 몰고 가면 죽은 사람에게만 부관참시를 하고 나머지는 유배나 곤장형에 처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니 죽이는 것으로는 더 이상의 해법이 없다는 것을 연산군 자신도 알았을 것이다.


 또한 연산군과 땔레야 땔 수 없는 폐비 윤 씨의 이야기도 자신의 생모를 향한 아련한 아들의 효심을 알 수 있으나 이미 그의 아버지 성종 때에 자행된 일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복위를 통해 폐비 윤 씨의 한을 달래주었다. 성종실록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이상 이미 당시 유교관으로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폐위된 왕비의 과거를 지우지는 못 했지만 복위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폐비 윤 씨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내 사약을 내리는 등 죽음을 죽음으로 갚아주며 피바람을 몰고 왔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평을 받지만 이 두 사화는 실은 대신들의 암투로 인해 발생된 사건이다. 특히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훗날의 임의적인 해석을 통해 원뜻을 왜곡하여 피바람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갑자사화 역시 폐비 윤 씨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대신을 쓸어버려 ‘사림이 화를 입었다’라는 뜻의 사화가 된 것이다.


 폭정과 함께 주색잡기로 왕실의 살림을 빈곤하게 만든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란 한자성어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채홍사를 통해 전국의 안여자를 모집하였고 그중 외모가 출중하고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을 ‘흥청’이라 불렀는데 연산군이 이런 흥정의 치마폭에 싸여 정사를 돌보지 못해 망했다는 뜻으로 ‘흥청망청’이 되었다.


 대표적인 흥청이 연산군이 그토록 사랑했던 장녹수로 매관매직뿐만 아니라 비리와 청탁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한 망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색을 사랑한 연산군은 행차 도중 마음에 드는 안여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탐하는 악행을 저질렀고 금표를 세우고 자신이 행차라는 곳의 민가를 허는 등 백성을 생각하는 않는 행동이 많았다.


 일부는 이런 연산군에 대한 평으로 유교정치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군주의 자질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태종, 세조와 같이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지만 반정이 일어날 만큼 민심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연산군은 지나친 왕권에 대한 욕망과 여색에 대한 무절제한 행동으로 인해 대신들과 백성들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성종도 어린 적부터 연산군의 이런 성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고 군주 수업을 통해 자신이 꿈꿨던 유교정치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세자도 자신의 생모 폐비 윤 씨에 대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며 폭정의 도화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성리학적 예와 도를 강조하는 조선에서 그는 있어서는 안 되었을 왕으로 평가받았고 대신들에 의해 폐위되는 최초의 폐주이자,  조선왕의 기록 중 최초의 일기가 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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