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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Mar 17. 2024

어부의 무덤

반석 위에 지은 집

예전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 적은 있지만 로마가 아닌 스위스 인접 지역인 밀라노만 다녀왔기에 항상 로마에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더 익숙한 실제 로마의 모습이 궁금했기에 더욱더 로마를 방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유시민 작가님의 <유럽도시기행 1>에서 묘사된 로마의 모습은 내 상상 속 로마의 모습과 거의 유사했지만 눈으로 본 것만 믿는 나에게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인들은 천부적 재능을 가진 공학자들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로마인들은 제일 먼저 도로를 만들어 로마와의 연결을 쉽게 만들었고, 그 지역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로마에 복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소원 중 하나가 로마의 시민이 되는 것일 정도로 로마의 시민이 되면 누리는 특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스파르타, 아테네보다 늦게 건설된 로마는 단순히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이오니아 해, 에게해를 넘어 대제국을 건설했고, 도버해협을 건너 현재 잉글랜드 지역인 브리타니아까지 점령했다. 도로를 통해 모든 것을 로마로 연결하게 만들었지만 로마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도교들이 오랜 세월 동안 믿어온 종교는 정복하지는 못했다.


 오랜 박해와 핍박에서 지하 깊은 곳에서 자신의 종교를 세대를 건너 전파하며 살아남은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공동으로 발표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통해 로마 제국의 정식 종교로 인정받게 된다. 밀라노 칙령을 통해 지하 깊은 곳에 있던 기독교는 드디어 땅 위로 올라와 햇빛을 받게 되었고 오랜 시간 성장을 비축한 씨앗처럼 로마 황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세계 3대 종교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때 지어진 수많은 교회들은 서구 사회의 정신적 토대가 되면서 오랜 기간 교황의 영향력이 유럽의 왕실까지 미치게 될 정도로 거대한 힘으로 작용했다. 로마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교황의 시작은 우리가 보아왔던 현재의 교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자리에서 출발했다. 가톨릭의 심장, 바티칸 시국의 중심부에 있는 바티칸 교회 지하에 잠자고 있는 지하 무덤의 주인,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제1대 교황이다.


 한창 기독교를 핍박하던 로마 군인을 피해 아피안 가도를 로마를 떠나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물었던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십자가 형은 흉악범을 처벌하는 형으로 산 채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보는 사람마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예수님의 마지막을 본 베드로는 차마 스승과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당할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최후를 맞이했고 이는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자, 반석 위에 지은 교회를 만드는 순교였다. 베드로(Petros)라는 이름은 반석을 뜻했던 라틴어 페트라(Petra)에서 비롯되었고, 실제 그는 반석이 되어 그 위에 바티칸 성당이 지어졌다.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던 그가 어떻게 제1대 교황이 되었는지는 그의 마지막 순간만 보아도 알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에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걸었던 그의 순수한 신앙고백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바로 반석이자 그를 이끌었던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대로 살고자 했던 노력은 베드로가 남은 흔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64~66년경 베드로는 순교 후 바티칸 언덕에 매장되었는데, 그의 무덤 주변은 이후 가이우스의 전리품과 로마 귀족의 가족묘가 다수 만들어졌다. 오랜 기간 만들어진 가족묘가 훼손되는 것을 황제가 싫어한다는 것은 눈치챈 로마의 기술자들은 바티칸 언덕을 흙으로 메우고 성당의 토대를 다졌다. 360년 경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옛 베드로 성당은 476년 로마의 멸망하면서 네크로폴리스는 잊혔고 1,000년을 잠들었다.


 1506년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바티칸 성당의 아래에는 여전히 베드로의 무덤이 중심이 되어 든든한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이름 뜻대로 살았던 베드로는 제1대 로마 교황을 넘어 그의 무덤을 신봉했던 수많은 기독교인의 추대를 받으며 화려한 상징이 아닌 흙벽 속에서 잠들었다.


 로마 군인의 감시를 피해 베드로의 무덤을 지켰던 사람들은 “여기 베드로가 있다”라는 명문을 남겼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글조차 읽을 수 없었던 사어였기에 화려했던 교황의 무덤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결코 베드로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가 그래피티 월 안에 잠든 베드로의 유골을 발견해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식적으로 베드로의 유골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베드로의 최후를 본 사람들도 남아 있지 않고, 당시 베드로의 무덤에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기에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면서 진위 여부에 따른 논쟁이 많았지만 다리가 잘린 그의 유골은 베드로라는 것을 확정시켰다. 만약 과르두치라는 학자의 열정과 모든 것이 은밀한 바티칸의 금기를 깨고 발굴 조사를 허락해 준 교황 비오 12세의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진짜 베드로의 무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은 마지막 순간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기에 끝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비록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에 불가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하고 자신의 이름대로 살았던 그의 인생은 반석이 되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공간을 주고 가톨릭의 심장 바티칸 대성당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다.


#몹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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