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길따라 걸어볼까
세상에는 번역을 하기 어려운 말들이 있다. 물결 위로 길처럼 뜬 달빛 '몽가타',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피카',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좋은 느낌이 드는 '심퍼티쿠시', 이 단어들이 품은 뜻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 명확하게 옮기기는 어렵다. 물론 한국에도 이러한 단어가 있다. '눈치'는 영어로 위트나 센스와 같은 단어로 번역이 되지만 감각, 판단력, 이해력, 재치 등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만큼 그 어떤 단어로도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는 어렵다.
언어는 글자가 아니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오랜 과정을 담아낸 역사이고, 대화를 나누기 위한 문화적 약속이다. 그래서 각 국가, 지역, 계층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들의 유기적인 사고를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 박사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리며, 오히려 말할 때 표정과 태도, 목소리 등의 비중이 93%에 이른다는 것을 밝혀냈다. 언어도 이와 같다. 글자에서 표현으로, 나아가 의미로 확장하는 이야기가 되는 과정이다.
세계에는 총 몇 가지 언어가 있을까? 세계적인 언어 정보 제공 사이트인 ‘에스놀로그’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모두 7,097개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에서 사용자가 가장 많은 언어는 중국어로 약 12억 명, 그 다음으로 스페인어는 4억 1400만 명, 영어는 3억 3500만 명이 사용하는 등 세계인의 96%는 몇 가지 주요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6,000개 이상의 언어는 전체 인구의 4% 남짓만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소수 언어들은 사용 인원이 제한적이고 그 문화도 지속되기 어려워 2주마다 한 개꼴로 사라져가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이렇게 소수 언어가 사라져가는 현상의 원인으로 다수 민족의 소수 민족에 대한 억압정책을 꼽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번역할 수 없는 단어, 사라지는 역사
사라지는 언어. 이들은 세계의 역사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감정의 한 축이다. 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곧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 국과 단체에서는 소수 언어를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유럽은 역사적 지역과 소수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ECRML)을 만들었고, 지난 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문화유산을 위한 AI’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멸위기 언어를 보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은 세상을 채우고 있는 소수언어를 소개한다. 언어의 표현과 함께 사용하는 민족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언어학자인 저자는 소멸 위기에 직면한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를 연구하고 있으며, 소수언어를 통해 독자들이 새로운 시선과 감정을 가져보길 권유한다. 하나의 낯선 단어로 감각의 여행과 세계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히라이스'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
'드바' 손의 감각으로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다
'베바라사나' 어디에 있어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보한타이오흐트' 기분 전환을 하거나 잡담을 나누러 집을 방문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아일랜드 전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다. 2007년 EU의 공동어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15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소수언어다. 특이한 것은 이 지역의 언어는 '네'와 '아니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가장 기본적인 의사표현이 없다니, 놀라우며 동시에 걱정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간편하게 의사를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네, 아니오 이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긴 하지만, 그런 면도 있지만, 등의 설명을 붙여가며 의사 표현을 보완하지는 않았던가. 간편한 대답으로 복잡한 설명을 대신하며, 사고 자체를 중단해 온 지난날을 돌아본다. 소수 언어는 오랫동안 고여 있던 생각을 새롭게 흐르게 한다.
세계에서 열 명 남짓 사용하는 '시마나'는 내리고 있는 눈이라는 뜻이다. 사할린 섬의 중부에서 북부에 걸쳐 사용하는 퉁구스어는 오로크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한 해의 절반을 눈과 얼음으로 쌓인 세계에서 생활하며 내리고 있는 눈, 쌓인 눈, 녹기 시작한 눈 등 세세하게 눈을 구별한다.
손발을 움츠려 몸을 작게 구부리는 '싱'은 인도어파의 중부 언어인 도마키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백 명 남짓하게 있지만 속담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한다.
일 년 후, 이 세계에는 어떤 언어만 남아있을까? 우리가 잊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면,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은 스스로 존재를 인지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표현으로 조언을 건넨다.
대체할 수 없는 글자, 한글
사라져가는 세계의 언어, 그 속에 한국도 있다. 2010년 유네스코는 소멸 위기 언어 목록에 제주어를 포함하며 노령 인구만 드물게 사용하는 4단계 ‘치명적 위험’ 언어로 분류했다. 실제 제주대 국어문화원이 제주도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학생들의 90%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한 단어는 120개 어휘 가운데 어멍, 아방, 하르방, 할망 네 개의 단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비단 제주어만일까? 일상에서 한글을 대신하는 외국어는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으며, 그나마도 올바르게 표기하고 사용하는 한글은 줄어들고 있다.
세미나, 워크숍,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 체크리스트 당연하게 외국어를 사용하며 우리는 이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한글을 잊어간다. 외국어 그대로 말해야 더 정확한 표현과 특유의 느낌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해당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번역할 수 없는 문화와 감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선을 돌려 한글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무심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말》을 펼치면 걷게 되는 거리, 바로 광화문의 '한글가온길'이다. ‘가온’은 ‘가운데’라는 의미의 순우리말로 한글의 역사와 상징,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던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글학회와 주시경 선생의 집터를 잇는 거리이다.
‘한글가온길’은 광화문역의 세종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이곳에는 세종의 역사와 그 중심인 한글에 대한 설명이 있다. 한글은 조선전기 제4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반포한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이다. 세종은 당시 일반 민중이 글자가 없어서 정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문자가 곧 힘이기에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억울한 일이 없도록 글자를 만들었다고 창제 이유가 적혀있다.
이렇게 탄생한 한글은 민중에게 배포되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의 언어, 즉 한자는 사대부가 쌓아올린 중앙정부의 견고한 기득권 통제 체제였다. 때문에 학자들은 특정 계급만 향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의 독점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에 위협을 느꼈으며 한글이 반포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중국의 고대 서체)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표준어가 아닌 언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1443년(세종 25) 12월 30일자 실록."
세종이야기를 읽으며 광화문 역사로 나오면 유명한 세종대왕 동상이 있고, 바로 옆으로 보이는 세종문화회관 공원에서 한글 조각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공원을 지나면 학글학회가 있는 한글회관, 주시경마당과 주시경집터 등이 하나로 이어지는 한글가온길이 펼쳐진다.
먼저 ‘이야기를 잇는 한글가온길’은 목재로 된 게시판에 한글과 관련된 글과 그림들이 담겨 있는 액자들을 붙혀 놓은 조형물이다. 한글이 임진왜란 때 암호로 사용된 이야기와 주시경 선생의 별명인 '웃음보따리' 등을 소개하며 역사 속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면 '주시경마당'이 나온다. 광화문 빌딩 사이의 아담한 녹지 공간으로 주시경 선생과 호머 헐버트 박사의 동상과 한글 조형물이 서 있다. 우리글의 문법을 처음으로 정리해 한글의 이론을 체계화했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어 한글 발전 계승의 초석을 만든 주시경 선생의 업적과 한글 보급 운동에 헌신한 헐버트 박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어지는 세종로공원으로 걸으면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 33인의 애국 열사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고초를 당한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세운 탑이며, 그 주변으로 펼쳐지는 '한글글자마당'은 재외동포를 포함한 국민 1만1천172명이 직접 쓴 한글을 새긴 돌로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창제된 한글의 역사는 녹록치 않았다. 창제 당시의 반대, 한자에 눌린 천대, 이후 일본어에 빼앗긴 국어의 자리,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외국어에게 존재감을 내어주고 있다. ‘한글가온길’을 걸으며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세계 문자 중 만든 사람과 만든 원리, 반포일까지 아는 유일한 문자, 한글을 연구하고 확장해 온 노력, 한글이 금지됐던 시대에 지키고 알리며 한글 사전을 완성한 역사, 한글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지난 2010년 2월, ‘보아 스르’라는 한 인도 여성이 노령으로 생을 마감했다. 특별하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 여성의 죽음으로 지구상의 하나의 언어가 사라졌다. 인도 안다만 제도의 마지막 부족원이었던 보아스르는 6만 5천년 동안 사용돼왔던 고유 언어 ‘보’ 를 구사할 수 있는 전 세계 마지막 사람이었다.
한글을 만든 사람, 지켜온 사람, 기억할 사람. 한글로 적어온 약속이 새겨진 거리 '한글가온길'에서 책을 펼친다. 사라질 것 같은 언어가 살아있는 길, 거리를 걷는 사람과 세계가 연결된다.
<한글 마당에서 읽기 좋은 책>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는 없는 52가지 단어를 소개한다. 낯선 단어들은 새로 영감을 깨우며 독자들의 감각을 확장한다. 단어와 함께 그려진 따뜻한 일러스트가 또 하나의 언어처럼 어우러진다.
유물로 보는 한글의 역사 / 정창권
한글박물관 스토리텔링 사업에 참여한 저자들이 한글과 관련된 유물 100여 점을 정리하고 각 유물이 등장한 배경과 과정을 조사하며 제작한 '한글 유물 스토리집'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을 들고 떠나기 좋은 공간>
국립한글박물관 /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한글 창제의 역사와 원리를 배우고, 한글의 다양한 쓰임새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박물관 1층의 도서관 한글누리에서 옛 책을 그대로 옮겨온 《음식디미방》, 《홍길동전》 등을 찾아 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