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삶은 내가 복잡하게 생각하는 만큼 복잡해진다

찰떡 직업을 찾는 모험 ep.14

by 일라

재취업을 한 지 2달 반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다.

2차 백수 때는 1차 백수 때와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백수가 되었을 때는 마냥 쉬기만 하면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 쉬기만 하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우울과 불안이 점점 내 숨을 조여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퇴사를 하기 전에 이직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음에 할 알바를 구하고 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알바를 구할 당시에는 아직 심리상담사로 돌아갈까 하는 미련이 있던 때여서 상담소 행정 알바에 지원했다.

상담 업계를 떠난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상담 자격증이 있어도 바로 시작하는 건 어렵고 상담에 대한 감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일했던 상담소는 방문하시는 내담자들께 카페처럼 커피와 차를 한 잔씩 만들어서 드렸는데

평소 카페 알바를 해보고 싶었던 나에게 딱인 것 같아 지원을 했고, 다행히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상담소는 우리 집에서 편도로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거리가 멀었지만 일주일에 2번 정도 나가는 거라 우선 다녀보기로 했다.


행정 업무와 내담자 응대, 전체적인 센터 관리, 음료 제조를 한꺼번에 하려니 생각한 것보다 꽤 바빴다.

어느 날은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이곳저곳 일을 하러 움직였던 것 같다.

한 가지 깨달은 건 내가 음료를 제조하는 일을 꽤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레시피대로 음료가 만들어졌을 때 묘한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또 한 가지 깨달은 건 난 멀티태스킹에 쥐약이라는 것이었다.

행정 업무를 할 때 사용해야 하는 프로그램이 약 3가지 이상 있었는데, 사용 방법, 메모 남기는 방법 등이 서로 상이해서 실수를 별로 하지 않을 때까지 두 달이나 걸렸다.


나 외에 행정 알바를 하는 분들이 몇 명 더 있었기 때문에, 서로 더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더 꼼꼼하고 실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또한, 대부분의 내담자 분들은 가끔 일어나는 우리 실수에 관대하게 넘어가셨지만, 가끔 불쾌하게 느끼시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실수를 할까 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알바 단톡방에서 새로운 메시지가 뜰 때마다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었을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꽤 까다로웠던 알바였지만, 매달 용돈 정도 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내 기대처럼 1차 백수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단 몸은 더 힘들었지만 정신은 더 맑았다.




원래는 상담소 알바를 평균 1년 정도는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복 약 3시간의 출퇴근은 생각보다 피곤함을 꽤 쌓게 만들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건 내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퇴사를 하기 전에 이유 모를 원인으로 몸 여기저기가 자잘하게 아프곤 했었는데, 이런 통증들이 낫지 않으니 사람을 미치게 했다.

수술을 할 정도의 아픔 정도도 아니니 어디 가서 아프다고 하면 꾀병으로 볼만한 자잘하고 길게 가는 통증들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과 대표님 모두 친절한 곳이어서 그만두기 아쉬웠지만, 계속 이렇게 견디며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알바를 그만두었다.

알바를 그만두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생각에 우울함이 더 심해질 것 같았지만, 리스크를 안고 내 몸을 위한 충분한 휴식을 취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나는 알바를 그만두자마자 더 깊은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이 있긴 했지만 결혼 준비 자금으로 탈탈 털릴 예정이라 돈을 펑펑 쓸 수도 없었고

몸도 안 좋아 밖에 자주 나갈 수도 없으니 집에서 요양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걱정하던 우울의 늪에 걸려들고 말았다.

우울은 나를 한심함으로 시작해 세상의 쓸모없음으로까지 깊게 굴을 파고 들어가게 했다.


그래도 1차 백수 때 우울감에 호되게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우울의 펀치 몇 방 맞고 정신이 혼미할 때도 매주 인스타툰을 그린다는 목표는 이를 악물고 이어나갔다.

하루종일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그것마저 약속을 어긴다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신뢰감이 먼지조차 안 남을 정도로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우울해도 내가 나랑 한 약속 한 가지는 꼭 지켰어'라는 말이 현실이 되도록 내 마음속에 꼬옥 품었다.



한 2주 정도 우울해하다 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적이 꽤 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백수가 되기 전에도 대학원 입시에서 떨어졌을 때 등, 살면서 일어났던 무수한 순간들 속에서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한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지나 바쁜 시기가 돌아왔을 때 늘 시때를 헛되이 보낸 걸 후회했다.


우울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해서 우울함이 갑자기 싹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최소 내 마음가짐을 바꾸게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이 안 좋아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다 보면 우울함이 올라온다.

한심한 나라는 생각이 들 때, 몸이 아파도 출근을 강행해야 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며 또 언제 이렇게 쉬어볼까 하고 더 재밌어 보이는 드라마를 골라 봤다.


그래서인지 알바를 그만둔 지 약 두 달이 지난 지금 나의 우울함은 조금 활기를 잃은 것 같다.

지금도 가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알바를 그만둔 직후보다는 꽤 나아졌고, 그러다 보니 밖에 나가 뭔가를 시도해 볼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삶은 내가 복잡하게 생각하는 만큼 복잡해져요.


쉬는 기간에 본 영화에서 이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는 내 인생을 조금 덜 복잡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찰떡 직업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강아지 멍순이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www.instagram.com/illamu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회사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