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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쉬면 불안한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찰떡 직업을 찾아 떠나는 모험 ep.21

by 일라

일을 쉬면 불안이 밀려오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적당한 돈을 손에 쥐고 놀면서 여유를 즐기는 한량의 삶을 꿈꿔왔는데, 한량이 되기도 전에 밀려온 불안에 눌려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다니.

내 인생의 한량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왠지 아쉬움이 든다.


일을 할 때는 직장에서 화나는 일이 있을 때 잠시 기분이 안 좋거나 했는데, 일을 쉬고 난 후 사람이 더 예민해지고 더 자주 슬퍼졌다.

사람이 자꾸 슬퍼지니 집에 있게 되고, 집에 있게 되니 동네 카페에 가는 것도 큰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야 했다.

집 밖에 나가는 게 힘들어졌을 때 이대로 더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담을 신청하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는데 이때는 만사가 귀찮고 에너지가 뚝 떨어졌을 때라 약한 두 달은 상담을 시작할지 말지 고민만 했다.

그리고 매일 우울한 게 아니라 일주일의 반 정도는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에, 괜찮을 때는 '이 정도면 안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내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리를 꽉 차지하고 있어서 타인까지 생각해 줄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이 별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화가 버럭 날 때가 있었고, 화를 내고 나면 자괴감이 화의 자리를 대신 채웠다.

뭔가를 할 힘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변화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나는 상담사로 일을 하기도 했었고 학생 때부터도 상담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어서 필요할 때 종종 찾았었다.

상담에 대해 호의적인 나조차도 상담 첫날 전까지 '나 혼자서도 이겨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어떤 곳을 매주 한 번씩 직접 방문한다는 게 조금 귀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매주 운동을 하러 가는 것처럼 나를 위해 하는 거다라고 생각하며 귀찮음을 꾹 누르고 상담소를 첫 방문했고,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상담을 해오면서 성향이나 상담 방향 등 나와 잘 맞지 않는 선생님들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떤 선생님과 만나게 될지 우려되었다.

그래서 나는 상담을 신청하기 전에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메모해서 신청한다.

나는 말투가 직설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서 상냥한 선생님을 선호한다고 써서 제출했었다.


상담에서 선생님과 한 주 동안의 내 일상을 말하고 그때 들었던 생각들과 감정들을 얘기하다 보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그때 그런 감정이 느껴졌는지 명확해졌다.

내 상담 목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인스타툰만으로는 수익을 낼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병행할 수 있는 세컨드잡을 찾는 것이었는데, 하루는 내 세컨드잡의 윤곽이 거의 잡히며 상담이 끝이 났다.


왠지 답을 찾은 것 같아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쉬다가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시작하는 일은 좀 더 진득하니 오래 하고 싶은 데 내가 잘 결정한 건지, 다시 시작했을 때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과 불안이 밀려와 며칠 동안 침대에 누우면 뒤척이다가 지칠 때쯤 새벽 늦게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 주 상담에서 내 이런 불안과 걱정들에 대해 말씀드렸고, 선생님은 사람들은 보통 실체가 없는 것에 더 불안을 느낀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어떤 게 불안했는지 구체적으로 메모해 봤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보니 놀랍게도 그날부터 불안이 잦아들어서 걱정하느라 잠 못 드는 밤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건 내가 성취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상담에서 다룬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대학생 때 어설프게 놀고 어설프게 공부한 그런 케이스였는데, 딱히 미래에 대한 확고한 목표라던가 그런 게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가 3학년이 끝날 때쯤 졸업이 다가오는 게 피부로 느껴지고 나서야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고 위기감을 느꼈다.


내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대외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먼저 시작한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또, 취업을 위해 이것저것 하고 있기는 한데 진짜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그냥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무작정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 제때 대학에 입학하고 별다른 사고 없이 무탈하게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니 사회에서 말하던 이렇게 살아야 한다 코스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실패의 낭떠러지에 떨어져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졸업을 한 학기 미루고 부전공에 필요한 추가 과목들을 들으며 취업과 관련된 자격증을 따기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해외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졸업을 하고 나서 약 5-6개월 정도 비자 유예 기간이 있었는데, 이 유예 기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친구들은 이미 졸업했으니 만날 사람도 별로 없었고, 난 차도 없었어서 혼자 바람 쐬러 어딜 가거나 할 수도 없었다.

누가 차를 타고 어디 가는데 태워준다고 하면 가는 거고, 그게 아니면 가끔 택시 타고 장을 보러 가거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마저도 이때 이사를 해서 집 근처에 학교에 가는 버스가 드물어 학교도 자주 가지 못했었다.


안 그래도 한없이 실패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작아 보여서 어떤 날은 먼지보다도 작아 보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유학 비용으로 우리 집의 기둥을 몇 개 뽑으셨는 데 나는 그 대가로 아무런 보상도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나의 이 한은 대학원을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는데, 취업을 하고 나니 드디어 한이 풀려 6년 넘게 날 괴롭혔던 불면증이 사라졌을 정도였다.


성취에 대한 욕구가 이때와 연관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상담에서 얘기하고 나니 생각보다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를 깨달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가 도망치고 싶어질까 봐 불안했는데, 도망치기 전에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한 번 더 도전해 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불안이 줄어들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은 내가 생각만 하던 걸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는 점이다.

늘 취업 공고를 찾아봐야지 생각만 하고 막상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취업 공고를 찾기 위해 웹사이트를 여는 것만으로도 뭔가 가슴 안에 커다랗고 두꺼운 벽이 툭 떨어진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결국 공고를 찾지 않은 날들이 많았는데, 얼마 전 문득 요즘은 어떤 공고가 올라왔나 궁금해서 대수롭지 않게 취업 공고를 확인했다.

심지어 그중에 괜찮은 곳이 보여서 한 군데 지원하기도 했다!


별거 아닌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취업 공고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서 도망치고 싶었던 나에게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큰 도약이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 취업을 하고 나서 독립했을 때 드디어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 같아 뿌듯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나에게는 한량의 영혼이 아닌 생활력 강한 모험가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나 보다.





찰떡 직업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강아지 멍순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www.instagram.com/illam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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