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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May 13. 2021

유서를 쓰고 분만실에 갑니다.

#출산 준비 #세 번째 유서 #비장한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나의 반쪽에게


안녕 내 사랑, 벌써 이렇게 세 번째 유서를 적어보아요. 오늘 저녁 8시 이슬이 비쳐 글을 남겨봅니다. 알아요, 이렇게 유언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하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혹시나 주님의 때가 지금이라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한다면 누구보다 그대에게 인사 정도는 남겨 놓고 싶어요.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이제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출산 중 사망률이 현저하게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생명을 이 세상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커다란 위기의 순간을 한 번은 넘겨야 하는 일이니까요.

 

첫째 때도 둘째 때도 감사히 몸 건강히 집에 돌아와 컴퓨터 바탕화면에 저장해놓은 유언을 내 손으로 지웠으니까 사실 아무도 읽지 못했지요. 유서를 쓰고 비장하게 분만실에 들어갔었다며 훗날 부끄럽게 고백을 하긴 했었지만요. 이번엔 바탕 화면 대신 이 곳에 글을 남기니,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이 글이 그대에게 전해져야 하는 순간이 오면 브런치에서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부디 건강히 셋째를 안고 돌아와 이 글을 또 지울지 말지 고민하고 있기를 바라요.


우선 산모와 태아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아이를 살려주세요. 내가 아이 대신 살아야 한다면 살아남은 후의 삶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에요. 첫째와 둘째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훗날 부모가 된다면 아이들도 저의 결정을 이해하겠지요. 가능하다면 장기 기증도 할 수 있길 바라요. 나의 작은 선택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될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의학적 이유로 저만 살아오더라도 아이의 몫까지 더 강하게 살아낼게요. 그리고 벌써 이렇게 얘기하려니 인간적인 질투도 느끼지만, 만약 괜찮은 사람을 만나 인연이 된다면, 다른 배우자를 만나도 괜찮아요. 그대는 너무 젊은 걸요. 천주교 법에는 반하는 일인가 싶지만 그래도 그대가 그런 결정을 했다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을 테니까요. 부디 나에 대한 미안함은 갖지 말아 줘요. 우린 그저 생명을 주신 분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기쁘게 따라야겠지요. 어차피 인생에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나에게 단 한순간도 완벽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멋진 그대. 나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든든한 배우자가 되어주어 감사했어요. 함께 지낸 결혼 생활이 어쩌면 가장 인생의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대를 만나고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더 성숙해질 수 있었는지, 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몰라요. 많이 부족한 저를 늘 사랑으로 감싸주어서 고맙습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게 쏟아주었던 모든 사랑과 신뢰와 믿음과, 지지와 응원, 돌봄과 배려에 감사합니다.


우리 처음 만나 마주 앉았던 깐부치킨도, 처음 같이 걸었던 판교의 산책길도, 배티 성지에서 돌아오던 드라이브 길도, 와인에 취해 걸었던 로마 공원의 밤 산책 길과 기차역도,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수많은 나들이 길도, 아이들 덕분에 배를 잡고 깔깔 웃던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의 행복한 시간들도 모두 마음에 가득 품고 떠날게요. 먼저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그대와 함께 행복했던 시간들이 이렇게 끝이 난다는 것이 무척 아쉽기만 하네요. 우리 매 년 연말에 해오던 타임캡슐 묻기도 아이들과 함께 해줄래요?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려, 얼마나 기억에 엄마가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매 년 봄에 피어나는 수선화를 보면, 잠시나마 곁에 있었던 엄마를 기억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일찍 떠나야 해서 미안하네요. 하지만 만약 정말 그래야 한다면 그 안에 또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지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 천사 같은 첫째와 매력적인 둘째 그리고 귀한 셋째까지 잘 부탁해요.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니까. 훌륭한 아빠의 큰 사랑 안에 아이들이 클 것이라 생각하면 크게 걱정되지 않아요. 하늘에서 보내주신 생명이니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다 돌봐주실 것이에요.


조금 먼저 가서 사랑하는 주님 곁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이들을 주님의 자녀로 키워내야 하는 큰 숙제를 혼자 하도록 남겨두고 떠나서 미안해요. 이 세상에서의 시간으로는 조금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하느님 눈엔 찰나의 시간일 테니까. 하늘에서 정해주신 때가 오는 그 날까지, 부디 건강히 아이들과 함께 많이 웃으며 지내길 바라요. 정말 고마워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존경하는 나의 단 한 사람 그대, 온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이렇게 만약 제가 먼저 가는 불효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말로도 죄를 씻을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염치없이 그리고 대책 없이 이렇게 우리 아가들 맡기고 가요. 늘 존경하고 사랑해요. 온전히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민재야 먼저 가서 미안해. 내 몫까지 부디 즐겁게, 남은 생을 살아주렴. 그러려면 엄청 즐겁게 살아야 되는 거 알지? 파이팅 나의 사랑스러운 개복치.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시 형제분들, 따로 부탁드리지 않아도 사랑으로 저희 가족들 함께 지켜주실 거라 믿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함께 보낸 지난 시간들이 있어 제가 더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그리고 친지 분들과 친구들께, 모든 사랑과 관심에 감사드려요. 함께 지낼 시간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가 행여 서운하거나 소홀했던 것이 있었다면 용서를 구해요.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 계속 좋은 지지자와 친구가 되어주세요. 오래 슬퍼하기보다는, 대신 가족들이 사회 속에서 다시 잘 자리 잡고 잘 커갈 수 있도록 오래 함께 해주세요. 어떤 식으로든 마음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신다면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엄마의 목숨보다 귀한 아인이 오민이, 우리가 늘 같이 부르던 노래 기억하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 두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우리 아가들 옆에서 오래오래 쭉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함께한 시간이 짧아서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꼭 안아줄걸, 한 번 더 귀 기울여 들어줄걸. 한 번 더 같이 웃고, 한 번 더 기다려줄걸. 그래도 부족함 많은 엄마를 이렇게 많이 사랑해줘서 정말 고마워. 너희들이 있어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어. 건강하게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몫을 즐겁게 하고 우리 다시 만나자. 조이야, 네가 이 세상에 건강하게 와준다면 엄마는 이 세상 떠나는 것에 아무 미련이 없다. 엄마가 어떠한 이유로든 너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약속하는데 아빠도 누나도 형도 진짜 괜찮은 사람들이야, 같이 사는 건 정말 꽤 재밌을 거야. 가족 구성원으로 온 것을 환영해.


우리 아가들 엄마가 정말 많이 사랑해. 다시 만나는 날까지 하늘에서 늘 지켜보며 함께할게. 엄마라고 불러줘서, 그리고 엄마가 사랑보다 더 큰 사랑 돌려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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