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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by 무느무느

내가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면 그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디저트에 더 열광적인 것 같긴 하지만 취향 차이일 것 같다. 내가 피부가 하얗고 손이 작다면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닐 거다. 유전이겠지. 내가 잘 웃고 리액션이 좋다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학습된 영향이 클 수 있으니 여자라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의 어떤 특징을 여자니까 혹은 남자니까 그렇다고 결론 내는 것을 사람들은 정말 즐겨한다. 너무 즐겨하기에 수정돼서 막 착상한 뱃속 태아에게도 그런 말을 갖다 붙인다.


임신 8주 정도 되면 태아 심장소리를 초음파로 들을 수 있다. 아직 작고 동그란 세포인데 그 가운데에서 반짝이며 뛰고 있는 심장을 보는 기분이란. 가슴 뭉클하기도 하지만 저 작은 원이 아가가 된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심장박동 소리가 말발굽 소리면 남자아이이고 기차소리면 여자아이라고 한다. 응? 일단 이 논리가 얼마나 정확한 추측인지를 떠나 성별이 결정 나지도 않은 세포를 굳이 남녀로 이분화해서 말해야 하나? 아직 태아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 값은 심장 뛰는 소리뿐인데 거기에도 남녀가 유별하다.


임신을 하고 나누게 된 대화에서 발견한 이 패턴은 놀라웠다. 마치 내 뱃속 아가가 머리에 큰 리본이라도 달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갔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새로운 이론을 소개받았다. 아들이면 임신한 배가 옆으로 커지고, 딸이면 앞으로 이쁘게 쏙 나온단다. 갸우뚱하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뱃속 아가 크기와 자세도 모두 다를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도 남녀유별은 예외 없다. 모든 행동과 생김새의 근거는 무조건 성별이다. 조리원에서는 우리 아가들이 여자아이라 선이 곱고 야리야리하단다. ‘저체중으로 작게 태어나서 그런 것 같은데요’ 말을 삼켰다. 그다음은 양육에 관한 코멘트들이다. 아들이면 매일 흙에서 뒹구느라 빨랫감이 많을 텐데 딸이라 다행이네. 딸이라 말도 빠르고 싹싹하겠네. 딸은 키우기 더 수월하다는데 축하해. 마치 여자는 착한 아이로 향하는 길을 이탈하지 않고 커가도록 태어나면서부터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어른들의 기대와 다르게 천방지축인 여자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가 왜 저래’ 소리를 들으며 자라나게 될지.


내 머릿속에 드는 의문에 간신히 답을 찾았다. 임신한 상태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아기의 성별뿐이기에, 관심을 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남자는 어쩌고 여자는 어쩌고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여자니까’ 해야 되는 꾸밈 노동, 감정노동, 돌봄과 같은 역할들에 신물이 나버린 나는 그 노무 여자아이 어쩌고 소리가 태어날 아이에게 또 다른 굴레를 씌우는 것으로 들릴 뿐이었다. 게다가 태어날 아기가 시스젠더 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른들의 성별 담론은 너무 성급하다. 태어나서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만들어가며 살면 되지 꼭 행동양식을 성별로 귀납 지어야 할까?


딸이라 말썽을 안 피워서 키우기 수월할 거라고 누군가 말하면 난 항상 대답했다. 내 딸들은 자기 멋대로 하면서 컸으면 좋겠다고. 내 딸들도 흙 잔뜩 묻혀올 수도 있고 부모 속 썩일 거라고. 지나가며 하는 말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다 받아친 걸 수도 있다. 별 의미 없는 말에 왜 그렇게 사냐고,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피로감을 느낀 분이 있다면 사과드린다. 이렇게 사과하는 건 내가 여자여서인가? 이건 확실히 여자여서 그러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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