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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핑크색을 입히냐고 물으신다면

by 무느무느

처음엔 생각이 확고했다. 머리털도 안 자란 아기에게 리본핀은 왜 달지. 건강하면 장땡인데 연약해 보이는 레이스는 좀 별로야. 뭐가 이렇게 죄다 핑크야, 핑크…. 아기가 자기 손발도 몰라 허우적거릴 시기부터 자기 성별은 단단히 광고하고 다닌다. 뭔가 부자연스러워. 갓난 아기가 여자라서 뭐, 어쩌라고. 남자면 또 뭐 어째야 하는데. 한 번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페미니스트 자아가 마구 비대해진다.


100일 사진 찍으려고 알아보다 소품과 아가 한복이 모두 이쁜 곳을 찾았다. 한복은 마음에 쏙 드는 게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살구빛 분홍치마가 은은하게 고왔고, 다른 하나는 진한 청록색 치마가 비취옥처럼 고급스러웠다. 하나만 고르기가 어려워 아이가 둘이니까 둘 다 주문해서 다르게 입힐까 싶었다. 근데 누구한테 뭘 입히지? 두 아이 중 누가 분홍이 어울리고 누가 청록이 어울릴까? 여러 대안들을 파죽지세로 제거해가며 비용 결제만을 앞두고 있었건만, 이건 정하기가 어려웠다. 아가가 커서 왜 자기는 청록색을 입혔냐고 물으면 어떻게 하지? 많은 동화 속 주인공들이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을 텐데 자기는 왜 그들처럼 이쁘게 해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면 어쩌나.


예전에 본 미국 시트콤에서 여자 주인공이 우스꽝스럽게 분노하며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엄마가 페미니스트라 어릴 적에 검은색 옷만 입었어!” 아닌가, 바비인형을 못 가지고 놀게 했다고 했던가. 어쨌든 그 여자 주인공이 꽃분홍 원피스(혹은 인형)를 갖지 못한 결핍을 성인이 되어서까지 간직한다는 것과, 그녀 엄마의 우격다짐 같은 페미니즘이 웃음 포인트였다. 내가 웃음거리가 되어서 조롱받는 건 괜찮다. 근데 우리 아가가 혹시라도 결핍을 느낀다면? 그건 안 괜찮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남자아이 용품보다 여자아이 용품이 화사하니 참 이쁘다. 아기 눈에는 오죽할까. 또래가 모두 핑크색 치마를 입을 때, 혼자 무채색 바지를 입는다면 내 아이는 자부심을 느낄까 소외감을 느낄까. 성별 고정관념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기 위해 과감하게 아기들을 실험대에 올려도 되는 걸까. 엄마가 되자 페미니스트 자아가 쪼그라든다. 아무래도 아가들이 안전하면 좋겠다는 생각만 든다.


비슷한 고민이 한 번 더 있었다. 예약해 둔 조리원에서 내가 불매하는 기업의 분유를 사용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기업은 결혼 및 임신한 여성 직원에게 부당한 처우를 일삼고 있어서, 타협 불가능한 불매 기업이었다. 절대 절대 그 기업 분유를 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아기에게 먹이게 되다니! 신생아는 새 분유에 적응하는 게 큰 일이라, 아가가 조리원에서 별 탈 없이 잘 먹었다면 같은 분유를 퇴소 후에도 먹이는 게 보통이다. 조리원에는 이미 거액의 예약금이 걸려있었고…. 내 신념 때문에 아가들에게 무리를 주면서 분유를 바꿔야 할까? 갓 태어난 아가들에겐 먹는 게 제일 중요한 과제인데, 어떤 분유든 잘 먹으면 됐지 신념을 앞세우는 게 내 욕심 아닐까. 거짓말 안 보태고, 새로운 왕을 모셔야 하는 망국의 충신처럼 괴로웠다. 그래, 내 욕심이다. 며칠을 고민하다 욕심을 버리자고 힘겹게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론 아가들이 저체중으로 태어나 소아과 의사 처방에 따라 다른 기업 분유를 먹이게 되었다. 다행히도.


스스로 깨달을 시기가 올 거다. 왜 여자아이 옷엔 잘록하게 허리 라인이 잡혀있는지 의문을 품는 날이. 공주님이 신은 구두가 이뻐 보이기보다는 불편할 것 같다고 느끼는 날이. 그 순간이 될 때까지 친절히 다른 대안들을 소개해주려 한다. 한동안은 핑크색이 좋고, 치마가 좋고, 긴 머리가 좋겠지. 이른 나이부터 이쁘게 치장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미 성별 구분이 공고한 세계에서 내가 페미니즘을 강요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그리고 아이가 핑크색만 좋아하면 또 어떠한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책도 핑크색 표지인데! 한동안 불매 기업의 분유를 먹였다는 사실로,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아이템만 사용한다는 사실로 누군가의 진정성은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은 지독하게 서로 얽혀있고, 중요한 사안은 너무 많다.


집에 핑크색 용품이 많이 생겼다. 선물 받은 옷들은 거의 꽃무늬가 있고, 레이스도 있고, 리본이 있다. 당근 마켓에서 사려고 알아보던 바운서도 핑크색 매물로 골랐다. (남편이 조심스레 ‘나 핑크색 사면 안돼?’하고 물었다.) 아무래도 아기한테는 밝거나 화려한 색깔이 좋은 것 같다. 눈길을 확 끄는 알록달록한 옷은 아기의 존재 자체를 축복해주는 듯하다. 나중에 우리 아가들이 커서, 엄마는 왜 자신들에게 핑크색 치마를 입혔냐고 투덜거리길 바라본다. 난 말하기도 피곤하다는 듯이 “니들도 한 번 살아봐~”라고 대답해야지. 그럼 싸늘하게 “어쩔티비” 이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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