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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ug 11. 2022

텃밭에 비비추가 있는데
가져가실래요?

김택돌



나이가 들면 화초가 좋아진다는 말, 나는 그 말이 싫다. 화초가 좋아지는 일에 나이를 들먹이고 싶지 않아서가 첫 번째 이유이다. 눈앞의 화초가 초록초록해서 좋다가도 갑자기 나이가 떠올라 기분 상하고 싶지 않은 게 두 번째 이유이다. 아무튼 나는 나이도 있고 화초가 좋다. 엄밀히 말하면 좋아졌다. 나의 화초 이력은 무료함, 헛헛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시간을 다루기에 화초만 한 것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책방의 겨울을 견디고 있을 때였다. 근처의 꽃집에서 3,000원에 데려온 홍콩 야자는 여름내 잘 자라다 겨울에 얼어 죽었다. 어떤 꽃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죽고, 어떤 꽃은 말라죽었다. 그리고 다음 봄 또다시 화초를 사 왔다. 새잎이 나면 호들갑도 아끼지 않았고, 돋보기를 옆에 두고 관찰하기도 했다. 잎이 시들하면 영양제 하나를 찔러 놓고 불치병에 걸린 식물을 살려낸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여름 내내 키우고 겨울에 이별하는 룰이 생기는가 했을 무렵 맹추위를 기꺼이 이겨낸 스파트 필름의 대견함은 내가 식물에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책방은 큰 사거리를 둔 대로변 횡단보도 앞이다. 가게 앞에는 3층 높이의 커다란 나무가 있다. 나무 중심으로 화단과 벤치가 있어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 나누기도 좋은 장소이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화단에는 반갑지 않은 담배꽁초와 커피 용기, 우유 팩이 쌓이고 그래서인지 화단은 잡초 하나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양토를 사 와 흙갈이를 하고 메리골드를 심었다. 메리골드는 오래가지 않아 시들어 적지 않은 실망을 했는데 이듬해에 그 흙 속에서 메리골드가 다시 나왔다. 민들레와 이름 모를 잡초도 올라왔다. 여전히 식물에 조예가 짧은 내게는 잡초도 꽃도 모두 식물이다. 공부를 해서 식물 이름을 척척 아는 사람이 되어도 (별로 공부할 생각 없음) 잡초와 꽃을 차별해 잡초를 뽑아 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무 화단에 풀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담배꽁초와 쓰레기 조각도 줄었다. 화단에 애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무렵 또 봄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올봄은 어떤 풀도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애플민트를 사 왔다. 호미를 들고 흙을 파내었다. 호미, 흙, 이 사랑스러운 촉감은 새로웠다. 손으로 흙을 다듬고 식물의 뿌리를 흙 속 깊숙하게 밀어 넣는다. 그리고 물을 흠뻑 준다. 호미를 쥐고 흙을 만지는 건 화초와는 다른 설렘이었다. 이런 맛에 조그마한 땅만 보여도 고추를 심고, 미나리, 루꼴라, 오이, 깻잎과 호박을 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나는 파란 물조리개를 유독 좋아했다. 따라서 파란 물조리개는 다양한 그림에 등장하기도 했다. 물을 가득 담고 기울이기만 하면 물줄기는 균등히 갈라서 뿌려진다. 땅의 더운 열기가 식고 아이들은 신이 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이 물로 새싹이 되고 풀이된다. 물조리개처럼 물을 쉽게 다스리는 존재도 흔하지 않다. 화단의 풀들은 매일 물을 기다린다. 나는 물 주는 시간을 기다린다. 아침마다 조리개에 물을 가득 채워서 뿌려준다. 잎과 줄기가 휘지 않도록 뿌리 쪽으로 멀리서부터 준다. 이제는 비 오는 날 물 주기, 노룩 물 주기가 가능한 경지가 됐다. 초록은 그새 빛이 난다.


작은 정원은 씨를 품고 있다. 며칠 전 배양토를 더 뿌리고 흙을 일궈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의 씨앗을 흙 속에 묻었다. 그 씨앗이 아침마다 나를 기다린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화단에 푸른 떡잎들이 일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잎의 정체를 몰라 아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의 자연 상식은 인과관계에 딱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씨앗이라도, 그것이 잡초라 해도 상관이 없다. 잡초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지만, 그것조차 상관이 없다. 나의 정원은 날마다 초록이 태어나고 있다. 이제 정원에는 비비추도 자라고 있다. 기분이 아주 우울했던 날, 지인이 “텃밭에 비비추가 있는데 가져가실래요?” 하는 말에 거절하지 않았다. 비비추비비추비비추 하면서 호미를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지만 날아갈 정도로 기쁜 건 아니다. 화초를 키우거나 정원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행위는 두고두고 오래오래 다정히 맛보는 기쁨이라 생각한다. 


나는 손님이 없을 땐 입구를 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곤 곧 시선을 거두어 몬스테라와 수박 페페, 유칼립투스, 벤자민을 본다. 책방이 가득 찬 느낌이다.



by 김택돌

instagram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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