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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하고 아름다운 May 20. 2019

보고 그리라고요?

“잘 그리셨네요”라는 말에

쑥스러워하며  “이거 사진 보고 그린 거예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나는

"그래서요"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고 그림을 쓱쓱 그리는 장면에서 그림을 그리는이느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자. 어린아이이거나 그리기 경력이 오래된 유명한 만화가쯤 될 것이다.

경력이 오래된 만화가란,

수많은 경험의 시간, 연습, 훈련, 반복 등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수없이 많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정보가 쌓여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언제든 그 정보를 꺼내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그 사람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안 보고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안 보고 그려야 하지?

왜 안 보고 그리는 게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선 어려운 질문이다.


‘보고 그리는 것은 괜찮다’,

그걸 받아들이면 그리기는 별거 아닌 일이 된다. 그냥 보고 그리기만 하면 되니까. 말 그대로. 보고 그리기는 잘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잘!

그게 관찰 드로잉(observation drawing)이다.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양이를 얼마나 잘 기억해 낼 수 있는지는  몇 마리의 고양이를 그려보았는지, 얼마나 다양한 종류를 기억할 수 있는지, 어떤 자세로 물을 먹고 어떤 자세로 싸우는지, 반갑다는 표현과 적개심을 드러낼 때의 눈동자와 몸짓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런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면 고양이를 보지 않고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양이와 호랑이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을 이미 말로 설명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머릿속에 상이 그려지지 않는데 보지 않고 고양이를 그리는 게 무엇에 좋을까? 그리는 자신이 좋을까? 보는 사람이 좋을까? 본인이 좋다면  


"행복을 빕니다"


다른 대상을 기억해 묘사해 내기 어렵다 할지라도 누구라도 잘 그리는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의 얼굴이다. 매일 들여다보고 어디 가 어떻게 생겨서 마음에 안 드는지 오늘은 어디 가 조금 나아 보이는지 남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변화를  잘 안다.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가장 많이 관찰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냥 그리지 못한다. 한 번은 그림 그리는 일의 면접(실기를 포함한)이 있다고 해서 미리 어떠한 정보도 없이 갔는데 도시의 지도를 그리라고 했다. 지도? 지도는 정보가 필요했고 막상 서울에 살았지만 서울 지도를 그리라니 뭘 그릴지, 어떻게 생겼는지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나를 제외한 열 명가량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자기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이 그림과 싸우고? 있을 때  나만 허공을 보고 빈 종이와 싸우고  있었다.


몇몇은 프리스타일로 보지 않고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들의 그림은 매번 그리는 그 스타일의 그림과 거의 같았다, 반복적으로 한 가지 스타일로 그리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린 건물은 다른 그림에도 등장했고 구도도 거의 비슷했다.


(어쩐지..

나는 조금 안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준비해온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서 이미지를 찾아 그리고 있었다. 당시는 스마트 폰이 막 생기기 시작했던 시기 었고, 난 아직 스마트폰이 없었다. 패닉이었다. 여기저기 계속 두리번거리며 난 망했구나 이렇게 준비성이 없으니 내가 이 모양이지 하며 좌절과 반성, 후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렇게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나는 스스로 날려버리는구나 자기반성을 반복하며 억지로 뭔가를 그렸다. 지도라는 것은  선으로 길이 있고 그 주변에 뭔가 있는 것, 그 안에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들을 나열했다. 나머지 한 장은 집에 가서 그려 내일까지 들고 오라고 해 다행히도 나는 그곳에서 탈출해 집에 와 인터넷으로 이미지를 찾아다녔다. 그릴 거리들을 찾아 서울엔 뭐가 있는지 동네별로 다른 분위기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그 면접에 붙었고 그림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면접에서 그리기를 시켜서이기도 졸업 후 처음으로 그림으로 돈을 번 일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그림을 그려서 번 가장 큰돈이 될 줄은 그땐 몰랐지만 말이다.


잘 보면 잘 그린다.

잘 보는 사람이 잘 그리는 사람이다.

똥 손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눈이 좋은 사람, 관찰력이 좋은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린다.

보기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그렇다.



각자가 좋아하는 사진을 골라서 그림 3장을 그려보자.


첫째, 보지 않고 그리기

고양이 뒷모습 보지 않고 그릴 수 있다면 그려보자.


두 번째, 두 번째는 사진을 잘 보고 그린다.

아래 고양이를 보고 그림을 그리기.


어딘가 이상해 보이고 어디는 길고 어디는 짧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고 그렇다면 이유를 찾아보자.



세 번째는 사진 위에 줄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린다.

사진에 줄을 그어보자. 나는 편의를 위해 실제로 같은 간격으로 가로 세로로 줄을 그었다.

그러나 실제 긋지 말고 줄이 있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고양이의 위치를 좌표점으로 생각하고 그려나가 보자.

자 세장의 그림이 그려졌다면 비교해보자.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이제 사진을 얼마나 더 자세히 보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완전히 파악한 다음에 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기를 한다면 아마도 훨씬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누구라도 말이다. 똥손인 당신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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