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당모의(作黨謀議) 17차 문제(文題): 2122년 >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부글거리는 배를 붙잡고 또 한 번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밤새 몇 번이나 뱃속을 비워냈는데도 더 나올 것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요동치는 뱃속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매일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메디컬 토일렛의 스크린에는 '변 성분 판독 불가'라는 붉은색 글자만 반짝였다. 변기의 물을 내리고 바지춤을 추스르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다시 세상이 밝아지기만을 기다렸다. 빈혈인가. 아니지. 몸에서 쏟아낸 게 피도 아닌데 웬 빈혈.
먹는 것은 잘 가려서 먹어야 한다고,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자기는 체세포에서 배양한 싸구려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비싸더라도 도축한 고기만 먹는다고 하던 성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도 그러고 싶다고. 나도 유전자에 장난친 음식을 먹고 싶지 않다고. 네가 생식세포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designer babies 였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진탕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아침 멀쩡한 얼굴로 출근하는 성훈을 보며 의심을 했어야 했나. 그냥 술 세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내 잘못인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래, 내 탓이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집안이다 하더라도 보통은 질병의 위험성이 높은 유전자만 손보는데, 집에 돈이 썩어 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부모가 자식의 알코올 분해 능력 향상을 위해 간의 유전자를 편집하냐고. 늘 피곤해하는 나를 보면서 피로는 간 때문이야, 하던 성훈이의 말이 내 걱정이 아닌, 지 자랑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메디컬 휴머노이드는 '신체의 이상 징후를 유발한 물질은 등록되지 않은 물질입니다. 임의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치료 프로세스를 가동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만 내뱉고 있었다. 고철 덩어리 녀석. 지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고작 암덩어리나 제거하는 것뿐이지. 이해는 한다. 메디컬 휴머노이드를 만든 제작자도 유전자를 편집한 간을 먹고 탈이 나는 것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식민지인 화성, 달의 약한 중력을 익숙한 지구의 중력으로 느끼게 해 준다는 gravity illusion 기능도 갖추고 있는 녀석이 그깟 배탈 하나 해결 못해 진땀 빼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꽤 우습다. 그나저나 유전자가 편집된 간이어도 간으로 인정해 줘야 할 텐데. 이 고생을 했는데, 간으로 인정 안 해주면 나 정말 울어버린다. 사람이고 뭐고 그냥 평생 구미호로 살다 죽어버릴 거다.
또다시 배가 꿀렁거린다. 아. 젠장. 최성훈 이 개자식아!
유전자 편집된 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먹었으니 됐다. 그깟 배탈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아진다. 고생스럽지만 버틸 수 있다. 간 하나 먹겠다고 19주에 걸쳐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금요일마다 타깃을 만나는 공을 들이는데 허탕인 경우도 많다. 4번째 타깃이었던 찬혁이가 그랬다. 너무 마르고 힘도 약해 보여서 이 녀석 타깃으로 괜찮을까 고민하다가 눈자위만큼은 눈처럼 하얗고 맑길래 그래도 간은 건강하겠구나, 하고는 19주 동안 정성껏 돌봤었다. 그 맑고 하얀 눈자위가 artificial organ 덕분이었다는 건 간을 직접 꺼내보고 나서야 알았다. 물컹하지 않고 딱딱한 기계의 촉감. 공들였던 19주가 너무 아깝고 분해서 주먹만 하던 그 기계 덩어리를 그냥 꿀꺽 삼켜보려고도 했는데, 헛구역질만 몇 번 하고는 내려놓았다. 그 뒤로 휴대용 metal detector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돼지 간을 이식했던 놈도 있었다. 9번째 타깃이었던 의찬이가 그랬다. 요즘 세상에 돼지 간이라니. 돼지의 장기를 이식하는 건 이미 40년 전에 사라진 의술 아니던가. 범죄자들 강제 이주지역인 district 9에서 암암리에 돼지의 체세포로 배양한 장기를 값싸게 이식해준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기계 간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 몇 푼 안 되는 돈도 없어 5년마다 재이식해야 한다는 돼지 간을 몸에 달고서는, 밥은 남자가 사야지, 넌 그냥 커피나 사라, 하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던 건가. 또 허공으로 날아간 19주의 시간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었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계 간보다는 나으니까. 돼지 간은 삶아서 소금 찍어 먹으면 맛이라도 있으니까.
클론 이야기는 하지도 말자. 눈으로도 구별이 안되고, 심지어 간 맛도 사람의 간 맛이다. 그냥 사람이다. 그런데 클론이라고 사람의 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단다. 복제 비용을 부담한 마스터가 따로 있어서 도난 문제로 다툴 소지가 있어서 안된단다. 도난 문제 때문이라니. 그럼 간 빼먹는 살인은 되고? 현실 모르는 탁상행정이 딱 이런 거다. 멍청한 것들. 지들은 이제 사람이다 이거지.
울적한 마음이 들다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났다. 늦둥이 손녀딸 사람 되는 건 보고 죽어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리 할머니. 김금희 여사. 어쩜 이름도 금요일마다 기쁜 일이 생기라는 의미였단다. 오랜만에 홀로그램을 켰다. 할머니의 모습이 방 안에 떠올랐다.
"우리 이쁜 손녀딸. 간은 잘 먹고 다니니?"
"응. 근데 이번 건 유전자 편집된 간이었어."
"저런, 저번에는 돼지였다며.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런다니."
"그러니까. 할머니 때는 정말 사람 되기 편했다고요. 요즘 서넛 중 한 명은 제대로 된 간이 아니야. 할머니. 나 꼭 사람 돼야 해? 힘들어 죽겠는데 구미호로 그냥 살면 안 돼?"
할머니는 인자한 표정으로 웃음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이런 원론적인 질문에는 당연히 답변을 할 수가 없겠지. AI에 불과한 홀로그램일 뿐이니. 그냥 힘들어서 한번 해보는 투정일 뿐이다. 몇 천년 동안 이어져 온 구미호의 고고한 핏줄을 내가 끊고 싶지는 않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24번째 타깃을 찾아 district 5쪽으로 나가보려 한다. 힘들지만 뭐든 꾸역꾸역 먹다 보면 언젠가는 100번째 간을 먹고 사람이 되겠지. 그것이 내가 짊어진 숙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람의 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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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