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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l 24. 2020

24시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회사를 그만두자, 아내는 바로 용돈을 10만 원으로 줄였다.

‘이제 생활비가 부족할 테니, 더 이상은 안돼.’

친구 두세 번 만나면 없어질 돈이었다. 대학생 때에도 용돈이 10만 원보다 많았던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내도 은퇴를 하면 10만 원으로 한 달을 지내겠다 했다.


아내는 두어 달에 한번 정도는 뿌리 염색을 위해 미용실에 갔었다. 어쩔 수 없어 가긴 하지만, 아내는 미용실 가는 걸 아까워했다. 이제 둘 다 돈을 못 벌 테니, 내가 자신의 뿌리 염색을 해 주길 바랐다. 기회였다. 이걸로 용돈을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내에겐  나와 같은 10만 원의 용돈이 있었다. 공짜로는 못 하겠다고 했다.

‘얼마면 돼!’

뿌리 염색을 하는데 대략 30분 정도가 걸렸다. 최저 시급을 고려했다.

‘5,000원!’

‘콜!’

흥정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내는 서둘러 계약을 마쳤다. 내가 너무 싸게 부른 건가. 미용실에서는 얼마를 받길래. 조금 더 질러볼 걸 그랬나.




2년 전, <숲 속의 작은 집>이라는 예능프로가 있었다. ‘미니멀 라이프’, ‘오프 그리드’라는 말들을 소개하면서 소지섭과 박신혜를 내세웠다. 가스나 수도, 전기가 없는 ‘숲 속의 작은 집’에서 불편을 친구 삼아 생활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보려 했다. ‘계곡의 물소리 듣기’ 나 ‘3시간 동안 식사하기’, ‘휴대폰 끄고 생활하기’ 같은 것들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런 것들로 긴 하루를 채웠다. 자연 속에 고립되어 소소한 행복을 찾아보는 일상. 그 예능은 스스로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회사생활로 꽤나 지쳐있었던 때였다. 다행히 그즈음에, 한 달을 쉴 수 있는 안식휴가가 있었다. 12년 일하고 받은 보상이었다.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한 달 동안 다닐 여행지를 찾고 있었는데, 그 예능 프로를 보고 단번에 마음을 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

‘나 심심해지고 싶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갈 거야.’
번잡하지 않을 것 같았던 치앙마이는 ‘자발적 고립’이 되기에 좋아 보였다. 아내는 짧게 며칠만 휴가를 내고, 여행의 초반을 함께 하기로 했다. 치앙마이에서 구경할 만한 곳은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모두 돌아보기로 했고,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홀로 ‘숲 속의 작은 집’ 살이를 시작하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단순했다. 운동과 책 읽기, 동네 산책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중간중간 멍 때리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처음 해보는 단순한 삶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지칠 때까지 운동을 하고, 눈이 아플 때까지 책을 읽고,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도, 해는 지지 않았다. 점점 남는 시간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길었고, 그런 단조롭고 심심한 일상은 일주일이 한계였다.


‘숲 속의 작은 집’ 살이는 나와 맞지 않았다. 소소한 행복을 찾기가 힘들었다. 주어진 시간은 무언가를 하면서 채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언가를 모두 돈 쓰는 일들로 채우기로 했다. 아침마다 요가를 하기 시작했고, 1대 1 원어민 영어 수업을 들었고, 5일 간 30시간을 들여 타이마사지를 배웠다. 거기에 이미 하고 있던 운동, 책 읽기, 동네 산책을 더하니, 다시 하루가 짧아졌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내 시간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대상이 있었다. 어릴 때 학교가 그랬고, 커서는 회사가 그랬다. 학교나 회사가 먼저 차지하고, 남은 것만 내 시간이 되는 삶을 40년 넘게 살아왔다. 온전히 하루를 내 시간으로만 채우는 삶은 해 본 적이 없다. 하루 24시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하루하루를 심심하지 않게 채워 나갈 것들의 준비가 필요했다. 치앙마이에서 보냈던 한 달의 시간은, 은퇴를 하기 전 좋은 예행연습이 되었다.




그나저나.

치앙마이에서 배워온 타이마사지도, 부족한 용돈을 채워 줄 수단으로 사용했다. 아내는 마사지받는 걸 좋아했다.

‘얼마면 돼!’

해외 유학으로 배워온 고급 기술이었다. 시간도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하지만, 유학파 출신이라 하더라도, 손님은 아내밖에 없었고, 아내도 그 사실을 잘 안다. 흥정에 불리했다.

‘10,000원!’

‘콜!’

흠. 조금 더 질러볼 걸 그랬나.


아내도 은퇴를 하면, 식탁에 메뉴판을 하나 붙일 생각이다. 나보다는 아내가 더 좋아하는 음식들, 이를테면, 가지구이나 감자전, 도토리묵무침 등으로 메뉴를 채워 넣으면, 주문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최근엔 라따뚜이나 또르띠야 얘기를 하던데,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그것도 메뉴에 넣어 볼 생각이다. 재료야 전부 생활비로 살 테고, 난 요리만 할 테니 가격을 많이 부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엔 흥정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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