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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Nov 25. 2022

백수와 다이어리

백수도 다이어리 선물 받을 수 있다.

12월 초 즈음 직장 내에서는 다음 해의 업무를 위한 다이어리를 배부한다.

회사 로고와 연도가 적힌,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그것들


아이 학원을 바래다주는데 그 학원 건물에 있는 회사인지

새로 제작된 다이어리 뭉치를 차에서 꺼내 운반하는 모습을 보았다.


'와 벌써 다이어리 받는 계절이구나. 그리고... 나는 이제 받을 수 없구나. 하하'


누군가의 책상에 무심코 놓일 그 다이어리.

재질과 색상을 불평하면서도 받지 마자 맨 뒷장에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게 될 그 다이어리.

회의가 열리면 재킷과 함께 꼭 챙기는 그 다이어리


직장에 다니지 않는 나는 더 이상 받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그 다이어리


찬 바람 때문인지 눈가가 매콤했다.




최근에 집으로 택배가 하나 왔다.

발신인을 보니 얼마 전 연구에 필요한 원고 자문을 해준 기관이었다.

내가 직접 그 기관에 방문에서 정식 회의를 했어야 하는데

거리도 멀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난감해하는 와중

그쪽에서 친절하게도 줌 회의를 통해서 진행해주었다.


뛰어 놀기엔 집이 좁은 아이를 위해, 키즈카페를 대관해서 놀게 하고

나는 구석에 딸린 작은 방에 노트북을 켜고 줌 회의를 했다.

문고리를 잠갔지만 엄마를 향한 아이의 집념은 모든 문을 열리게 한다.  

호기롭게 "안녕 친구들!"을 외치며 달려 들어오는 아이 덕분에

화면 너머에 계신 모든 분들이 웃었고 나는 울었다.




퇴사는 했지만, 그래도 책 한 권 출간한 저자라고

감사하게도 책으로 이어진 인연들이

나를 가끔 일하게 한다.


그 노크가 너무 감사해서 단 한 건도 거절한 적이 없다.

(백수 주제에 거절해 서도 안되지만)


택배 봉투 안에는 기관의 유인물들과 다이어리 한 권이 들어있었다.

2023년이 표지에 새겨진 그 다이어리

와, 내가 백수 신분에도 새 다이어를 받을 수 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직장 다닐 때처럼 사업계획서 작성 일정이나, 송년회 일정을 단박에 적을 순 없지만

12월 달력 페이지를 펴고 빨간펜으로 소심하게 적었다.

12월 10일 : 라라 합평회


나도 연말에 일정 있는 아줌마가 되었다.




육아는 목표를 아무리 설정한다고 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올해도 분명 소기의 목표는 있었지만, 달성된 것은 거의 없었다.

수치로 표현하자면 '달성률 60%' 정도나 되려나

하루하루가 변수의 연속인 육아인데, 목표 설정은 너무 거창하여 한편에 미뤄만 두었다.


그래도 내년에는 이 다이어리와 함께

하루하루 채워가는 기분으로 살아야겠다.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연간 목표: 아기와 행복하기

일일 목표 달성률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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