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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Sep 08. 2024

영원한 나의 보호자들


기억 속 외할머니는 무서운 분이셨다.

당신의 딸을 힘들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플라스틱 파리채를 탁탁 내리치면서 으름장을 놓는, 귀여운 손주들보다도 당신의 자식이 우선이던 무서운 사람.

항상 기운 넘치던 모습과 달리 화통 같던 목소리는 언젠가부터 작아졌고 억센 나뭇가지처럼 여간해선 꺾이지 않던 고집도 나날이 줄어들었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혼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어린아이가 된 할머니를 마치 본인의 아기인 양 돌보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황금색 보자기를 둘러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손수 만졌고, 목욕탕에선 말랑한 살결이 다칠까 조심스레 때를 벗겨내고, 점점 더 보드랍고 보드라운 음식들을 찾아 입 안에 넣어주었다.

절대 늙지 않을 것이라고 약해지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할머니가 씻기 싫다고 어리광 부리는 모습을 볼 때면, 그리고 행여 넘어지지는 않을까 그녀의 주름진 두 손을 꼭 붙잡는 엄마를 볼 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모는 자식으로, 자식은 그 부모의 보호자로 역할이 바뀌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도 나를 낳아 기르고 사랑해 주던 엄마·아빠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강인한 눈빛만 보이던 얼굴에 가득 차오르다 떨어지는 눈물이 잦아질 때.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척척 시켜주던 메뉴판 위 거침없던 손가락이 키오스크 앞에서는 한참을 머뭇거릴 때. 어린 나를 업어주던 크고 단단한 어깨가 한 뼘 한 뼘 작아질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연약해진 그들 앞에서 괜히 센 척을 하며 큰소리를 떵떵 쳤고, 배달 앱이나 키오스크 같은 현대 문명(?) 사용법을 반복해서 알려줬으며, 건강검진 시기가 되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곤 했다.

 

불가항력이라는 단어처럼 어쩔 수 없이 나도 엄마·아빠의 보호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찰나, 예상치 못하게 걷다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넘어진 것 치고는 다침의 정도가 꽤 심했지만 아무리 크고 깊다 한들 그래봤자 찰과상이니 내게는 가벼운 해프닝이었는데, 부모님에겐 걱정을 일으키기 충분한 소식이었나 보다.

 

다친 이후 밤 출근을 하던 어떤 날 엄마는 배웅을 한다며 병원 앞까지 함께 걸어가자고 했다.

“진아. 발에 힘주고 똑바로 천천히 걸어”

나란히 걷다 신호등이 바뀌고 혼자 걸어가야 했던 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엄마가 양손을 머리 위로 힘껏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 순간 어둑한 밤하늘에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듯 주변이 환히 밝아졌고 나는 응원에 힘입어 두 다리로 땅을 단단히 지탱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혼자 있는 것이 실감 나는 시간들이 있다.

예전에는 외로움의 설움이 사라질 때까지 오롯이 버텼지만 이제는 그날의 출근길을 종종 떠올린다. 사랑으로 나를 지켜보는 엄마·아빠를 생각하면 나는 결코 혼자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설령 그들이 나보다 약해지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그들은 든든한 보호자로 내 등 뒤를 우뚝 지키고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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