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없이 진실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지원자 전한진입니다”
직장 면접을 볼 때는 1분 자기소개라는 것을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을 잘 나타내고 사회초년생의 열정과 풋풋함을 보일 수 있는 임팩트 있는 문장이 필요했는데, 나는 늘 ‘전한진’ 이름 석 자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으로 자기소개의 포문을 열었다.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준 것이었는데 한평생 불릴 이름에 하필 ‘진실’을 넣은 것을 보면 그들은 세상 모든 가치 중 정직을 가장 큰 미덕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엄마는 어렸을 적부터 ‘가진 것이 없어도 절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나 ‘실수는 어쩌다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일부러 하는 일이다’와 같은 정직의 규범에 대해 질리도록 얘기해 왔다. 덕분에 지금까지 절대 잊히지 않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학교에서 체험학습 신청을 위한 가정통신문을 받은 날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놀기 바빴던 나는 통신문을 가방 구석에 박아놓은 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며칠 동안이나 오지 않는 가정통신문에 의아했던 엄마는 학교에서 받은 것이 없냐고 물었는데 순간 귀찮은 마음에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엄마는 이미 다른 학부모들과 대화하며 체험학습 신청서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단지 사실확인을 위해 슬쩍 떠 본 것뿐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엄마를 속이려고 한 것이다. 순진했던 건지, 바보 같았던 건지.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벌은 회초리 맴매라는 거대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사실 통신문의 유무 정도야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스스럼없이 거짓말한 행동에 대한 대가는 매서웠고 회초리는 무척이나 쓰렸다. 거짓말이란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는 행동.
몸소 체득한 뼈 아픈 교훈은 그 이후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거짓말의 유혹 속에서 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부끄럽더라도 모르는 것은 절대 아는 체하지 않고 물어보기, 실수하는 일이 생기면 숨기지 않고 인정하기, 고맙거나 미안한 일이 있을 때는 꼭 마음을 담아 제대로 표현하기 등. 다른 사람과 나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던 중 나와 타인을 동시에 속이는 일이 생겼다. 때는 대학교 4학년, 병원 취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나름 성적과 스펙 관리에 힘을 쏟은 대학 생활을 보냈던 터라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취뽀성공의 기대와 부러움을 받고 있었다.그렇지만 자신감이 높아도 너무 높았던 것일까. 빅 5 병원 중에서도 특히나 큰 규모로 명성이 자자한 빅 3 병원에만 지원했던 나는 처참하게도 세 곳에서 모두 불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취뽀는 취업뽀개기의 줄임말인데, 당시 내게 취뽀란 단순히 취업한다는 것을 넘어 국내 빅 5 병원에 취업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합격이라는 암담한 단어를 품은 메일을 본 순간 들었던 감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동안 줄기차게 그려오던, 찬란히 빛나던 미래에 대한 절망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가족들에게 불합격 소식을 차마 전할 자신이 없다는 걱정이었다. 자존심과 자신감 모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던 나는 결국 아직 취업공고가 뜨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며 다른 병원으로 취업을 준비했다.
당당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취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은 아린 듯 콕콕 저릿했다. 그건 원하던 곳으로 취업하지 못한 뒤 다른 병원 곳곳을 기웃대는 초라한 내 모습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저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뻔뻔한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다른 곳에 취업하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거짓말을 했다. 긴 시간 꿈처럼 품었던 희망병원에 대한 미련으로 웨이팅 기간에 다시 한번 재취업을 결심한 것이다. 어김없이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하며 집 밖에서 취업 스터디를 했고, 입사 전 공부할 것이 있다며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면서 짐가방에 정장을 챙겨 면접을 보러 갔다.
어떤 기대도, 실망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짓이었다. 나의 실패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며 좌절감 또한 나 혼자만이 느낄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내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니까.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기다리는 부모님을 보면 찔리는 순간은 많았지만,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애써 자기 위안하며 넘어가기 바쁜 날이었다.
장타로 길게 가야 하는 거짓말은 기억력도 좋아야 한다. 매일 같이 새로운 거짓말을 하고, 했던 거짓말을 철저히 기억하기 위해 캘린더에 메모까지 남기던 그로부터 한 일 년쯤 지났을 때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가고 싶어 했던 병원 근방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을 바라보며 부모님은 ‘사실 다 알고 있었다고, 발령일을 기다리면서도 원래 가고 싶어 한 OO 병원 준비했던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확히 물어보지 못했던 것은 행여 기대하는 것처럼 비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거짓말을 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딸아이의 속임수를 진작 눈치챘지만 그 눈물겹도록 치열한 노력을 지켜주기 위해 부모님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자신들의 두 눈을 가렸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두 귀를 막았다. 내게는 진실하게 살기를 바라는 이름까지 지어줬으면서, 때론 모진 회초리를 들면서까지 솔직하게 행동하기를 가르쳤으면서.
모든 거짓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세상에는 누군가를 속이고 곤란하게 만드는 거짓도 있지만, 상대를 지켜주기 위한 거짓도 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속고 속였고 또 기꺼이 속아주었다. 미안함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은 거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