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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진 Sep 15. 2024

해야 하는 건 마음을 기억하는 일


나는 선물을 좋아한다. 이렇게 쓰니 공짜 물건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물질만능주의자가 된 것 같기도 한 기분이다. 물론 그런 것 치고는 매번 속삭이듯 조용한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벅찬 나다. 그러니 다시 한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좋아한다.


선물을 받을 때면 꼭 다른 때와 어김없던 하루가 갑자기 환히 밝아지는 기분이다. 방금까지는 무료하고 특별한 것 없던, 어쩌면 팍팍하다고 느끼던 오늘이 누군가의 작은 호의 하나로 바뀌는 것이다. 새로운 행복감으로 남은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받은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기억에 오래 자리하는 것은 받은 물건보다는 당시의 분위기였으니까. 건네는 사람의 눈빛, 온도, 뒤따르던 다정한 대화 같은 것들 말이다.


이렇기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보통 마음을 더 쏟는 편이다. (기념일 챙기는 것을 좋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살다 보니 누구보다 열심히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선물 고르는 일에 꽤 오랜 시간을 들이곤 하는데, 대개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뜬금없는 선물 공세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등의 걱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상에서 자주 하는 선물의 종류는 이런 것들이다. 전하고 싶은 말이 들어있는 책, 맛있게 먹은 음식이나 디저트, 상대가 좋아할 것 같은 물건과 같이 작고 가벼운 것.


작고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소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나의 경우, 크기와 가격, 물성과 관계없이 생일선물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날에 받는 선물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한 것, 근무 중간 당 떨어짐을 염려해 넣어놓은 간식, 진심이 담긴 편지, 그저 생각이 났다는 이유로 전해지는 선물과 그와 함께 마음속 깊숙하게 자리하는 말들. (그렇지만 모든 선물은 언제나 멋지고 귀하다)


기념일이 아닌 특별히 기억하지 않아도 될, 바쁜 일상의 틈새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생각한다는 것은 남몰래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아닐까. 곱씹을수록 커지는 감동이다.


다만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유일한 문제는 매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면 ‘왜 이렇게까지 주는 행위에서 만족감을 얻는 걸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이전까지의 결론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하는, 내심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다소 이기적인 마음이지 않았나 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선물에 대해 적다 보니 지난겨울에 받은 것이 떠오른다.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궁금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내향형인 것과 그다지 관련은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나는 이름만 불려도 머릿속에서 근 한 달의 기억을 헤집어 기어코 실수 비슷한 것을 떠올리는, 굳이 노력을 애먼 곳에 하는 피곤한 사람이다.


잔뜩 긴장한 내게 건네진 것은 체온으로 알맞게 데워진 귀여운 캐릭터가 알록달록 달린 열쇠고리였는데, 무려 새해라는 명목으로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날아온 것이었다.


하루 종일 주머니 안에 넣어 다니며 마주칠 때만을 기다리다가 결국 영 마주할 일이 없자 따로 불러내신 모양이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지만 아무렴 생김새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단히 새겨진 건 손에 닿자마자 아-따뜻하네. 하고 느껴진 열쇠고리의 온도와 촉감, 새해 선물이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보이던 선생님의 멋쩍은 표정과 내내 자리하던 불안이 안도감과 기쁨으로 바뀌던 것을 숨길 수 없던 나의 목소리였다.


1월 1일 혹은 설 연휴 정도나 되어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누는데, 그 사이 어딘가쯤에서 받은 새해 선물이라니. 어릴 적 설빔과 세뱃돈을 제외하고는 처음인 새해 선물. 손안에 쥔 열쇠고리 너머에서 전해지는 위안으로 나는 또 한 계절을 잘 살아낼 힘을 얻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거슬러 오를수록 어쩜 주었던 날보다 받은 날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으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만들어내던 많은 날이 아마 내게도 사소함으로써 상대의 오늘을 환히 만들고 싶은 생각으로, 곧 주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결국은 넘치게 받은 기억이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곁의 주변인들을 더욱 살뜰히 챙기는 것,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준 이들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떠오르는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고르고, 글자로 진심을 적어내고, 마음을 전할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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