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쉬는 날인데 뭐 할까? 할 일 없으면 만두나 빚을까?”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 없으면 오랜만에 김밥 싸서 분식 파티하자”
‘라면에는 김밥, 냉면에는 만두’의 불변의 공식처럼 단독으로 나서는 일은 잘 없지만 대표 메뉴 옆에 든든히 자리하는 단무지 같은 친구들이 있다. 바로 김밥과 만두이다.
집에서는 김밥과 만두를 자주 만들곤 했다. 물론 곁다리 음식답게 ‘할 일 없으면’ 혹은 ‘먹고 싶은 거 없으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채로였다. 심심할 때 김밥과 만두를 선택했던 건 나름 치밀한 계획이었는데, 이들은 먹는 데에는 5분 남짓이지만 재료를 손질하고 만들어 입으로 향하기까지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품이 유난히도 많이 드는, 시간을 때우기 좋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볶고, 말고, 썰기’나 ‘치대고, 빚고, 찌기’라는 간단한 단어들만으로 그 과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고생을 높이 살 수도 없는 아픈 손가락 같은 음식이었다.
자주 만들지만, 김밥을 말 때와 만두를 빚을 때면 숨을 후읍-하고 참는다. 욕심을 내어 속을 가득히 넣을 때면 어김없이 김밥의 옆구리는 뻥뻥 터지기 일쑤였고, 만두피는 열심히 부풀어 오르던 배를 훤히 드러냈는데, 반대로 잔뜩 겁을 내어 속을 찌질하게 채우면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과 피가 품을 수 있는 적정한 속을 채울 때 비로소 들어간 모든 재료의 맛이 조화로웠고, 옆에 자리한 메인 음식과도 서로 부족한 맛을 채워주는 환상의 짝꿍이 되어주었다.
간절히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노력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다. 양손에 쥔 것들 중 뭐 하나라도 놓기 싫었을 때에는 잔뜩 벌여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몇 날을 울면서 밤새웠고, 보통보다 마른 체형을 갖고 싶었을 때는 겨우 삶은 계란이나 닭가슴살 한 덩이로 식사를 때우며 몇 시간씩 운동했다.
결과적으로 그때그때의 작은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성과를 감안해도 손해를 본 것이 분명했던, 험난한 과정이었다. 밤샘 뒤에는 또 며칠간 밀린 잠을 몰아 자느라 만성 피로에 시달렸고, 속도를 채 감당하지 못하는 무리한 체중감량으로 툭하면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무던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무모한 욕심이었다. 갖고 있는 그릇에 맞지 않는 알맹이를 채우기 급급해 결국 넘치기도, 때론 깨뜨리기까지 했던 욕심.
그럼에도 여전히 조바심이 난다. 설명할 수 없는 조급함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 나는 조용히 김밥과 만두를 만든다. 김밥 김 위로 하얀 쌀밥을 넓게 펼치고 고운 색을 뽐내는 계란, 시금치, 햄, 단무지, 당근을 쌓아 차분하게 꼭꼭 만다. 동그란 모양의 만두피를 밀고 곱게 뭉쳐져 있는 소를 한 숟가락, 그리고 두 숟가락 올려 피의 끝부터 꼭꼭 오므린다. 재료가 동이 날 때까지 반복하면 쟁반 위에는 어느덧 잘 말려진 김밥과 잘 빚어진 만두가 한가득인데, 같은 날 만든 것이지만 처음 만들었던 것과 마지막의 것을 비교하면 늘 마지막에 만든 것이 만듦새도 보기 좋고 속 재료도 더 그득히 차 있다. 가진 김과 피의 크기에 맞게 조심스레 채우다 보니 손기술도 늘고 담을 수 있는 속도 많아졌나 보다. 한 입 먹어보니 재료가 풍성한 것이 역시 더 맛있다.
주변을 되돌아보면 돌고 돌아 자신의 꿈을 이룬 친구,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친구,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 기특하게 대견스러우면서도 그 사이 어딘가 나의 자리가 있긴 한 건지 혹은 애초에 내 자리는 여기인데 바보처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간판에 당당히 자리한 대표 메뉴가 되고 싶지만, 메뉴판 서너 번째에나 위치한 김밥과 만두처럼 마치 세상의 사이드 메뉴가 된 듯한 불안함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라면, 냉면, 떡볶이와 같은 대표 메뉴보다 김밥과 만두를 만들 때 더 많은 재료가 들어가고 더 오랜 정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품은 많이 들어 고생스럽지만, 완성된 뒤에는 어느 것에도 뒤처지지 않는 풍부한 맛을 낸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내 자리에서 묵묵히 김밥을 말듯, 만두를 빚듯 내실을 쌓아야겠다.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질 때까지, 나의 맛이 다양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