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사는 즐거움인 내게 저녁 메뉴는 가볍게 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고, 또 누군가는 진로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다는데 내게는 고작 메뉴 고르는 것이 난제라니. 비록 한 끼 먹는 일이지만 메뉴에도 T.P.O가 존재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를 해 본다.
Time, 저녁은 하루의 마지막 끼니이다. 그리 든든하지 않은 점심을 먹고, 어떨 땐 그마저도 모조리 소화한 텅 빈 위장을 위해 풍성한 음식이 필요하다.
Place, 매일 마주하는 집밥은 흔하지만 동시에 냉장고 사정에 따라 다종다양하다.
Occasion,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닌 특별한 상황에서 식사하는 날이 있다. 이를테면 기념일을 축하하거나 슬픔에 위로가 필요한 날 말이다. 이럴 때는 식탁을 함께 공유하는 상대의 취향, 상황, 감정에 맞는 음식을 고른다.
비장하게 손을 씻고, 칼질할 준비를 할 때에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주방의 메인 셰프. 달큰한 맛의 양파는 깍둑썰기로, 살캉거리는 애호박은 나박 썰기로, 칼칼한 청양고추는 어슷 썰기로, 부드러운 두부는 도톰한 네모 썰기로 썰어 된장을 푼 물에 차례대로 넣는다. 장맛이 우러날 때까지 바글바글 끓이는 동안, 곁들일 반찬으로는 전을 부치기로 정했다. 오늘의 전은 된장찌개의 삼삼한 맛을 보완하는, 고추장을 넣어 만든 장떡이다.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던 엄마의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반찬 중 하나라고 했는데, 구수한 된장찌개와 추억의 장떡. 놓고 보니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러니까 식탁의 주제는 ‘투박한 시골의 맛’이 좋겠다.
내가 할 도리를 마치고 시간의 도움만이 필요할 때에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몸을 앉히고 현관문 밖으로 조용히 윙윙대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귀 기울인다. ‘반찬이 식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으로 퇴근길의 가족을 재촉하는 연락을 보내고, 음식의 온도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그러면서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면 간도 재차 다시 보며 애타게도 기다렸다. 드디어 띵동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족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재빨리 밥과 국을 데워 상에 차린 뒤 미쉐린 레스토랑의 셰프처럼 설명을 덧붙인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고 하길래 저녁에는 든든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된장찌개 끓였어.” “청양고추도 조금 넣어서 칼칼하게 했는데 맵지는 않아.” “엄마, 이건 장떡이야. 먹어봐. 시골에서 자주 먹었다며.” 행여 입맛에 맞지 않아 혹평을 듣게 될까 쉴 새 없이 말하던 중 보이는 경쾌한 숟가락질 세례. 누군가는 반찬을 여러 번 집어먹었고, 또 누군가는 국에 밥을 마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주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맛있게 먹는 가족들과 숟가락에 수북히 퍼진 쌀밥을 바라보며 곱씹어본다. 하루 종일 골똘히 메뉴를 고민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음식을 만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기다렸던 하루에 대해서.
“누군가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 적이 있나요.”
“네.”
기다림을 말할 때 억겁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순전히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고, 맛있게 먹어줄 그들을 기다리던 하루는 마치 영원과 같은 시간이었다. 원래의 속도보다 한참을 더디게 지나가던 시간. 그러나 무한히 오랜 시간이라는 의미의 ‘억겁’의 반대에는 ‘찰나’라는 단어가 있다. 기다리던 그들과 마침내 둘러앉아 따뜻한 찌개를 나눌 때, 반찬을 권할 때, 말문을 열 때에 멈춘 것처럼 느껴졌던 시간은 그 뒤처짐을 메우기라도 하듯 숨찬 뜀박질을 했다. 지난한 기다림은 알고 보면 설레는 기대였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하나로 모이던, 들여다볼 수 없어 알 수 없던 서로의 하루에 가까워질 수 있던, 유일한 때를 기다리던 설렘. 영원이 찰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