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 배를 붙잡은 채 먹이를 찾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에게 포착된, 불쌍한 희생양은 냉장고에 고이 잠들어 있던 그릭요거트였다. 새큼한 요거트 위에 과일을 담고 꿀까지 휘휘 뿌리면 그야말로 꿀이다. 정말로 꿀맛이다.
꿀맛, 꿀잼, 꿀잠, 꿀성대. 일상에서 자주 듣고, 사용하는 이 단어들은 모두 단어 ‘꿀’에 ‘맛’, ‘잼(재미)’, ‘잠’, ’ 성대’가 더해져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여기에서의 ‘꿀’은 ‘좋다, ‘행복하다’, ‘달콤하다’의 긍정적 의미로 쓰여 주로 만족스러운 상황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꿀 빨다’는 어떨까? 일이나 생활 따위를 매우 쉽게 한다는 의미의 ‘꿀 빨다’는 남들에 비해 쉬운 일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보다 고생을 덜 하거나 하지 않는 상황을 뜻한다. 앞서 나온 꿀 시리즈 신조어들과 비교하였을 때 칭찬보다는 비꼬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가 꿀 빤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거다.
정식 입사일이 정해졌을 때 회사에서는 희망부서 조사를 했다. 달마다 몇십 명씩 줄줄이 소시지 합격자들의 선호를 전부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희망하는 인원만큼의 공석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나만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들뜬 기대와 희망을 키우고 있었다.
[ 1지망 : 응급실 / 2지망 : 중환자실 / 3지망 : 병동 ]
반듯하게 적어내었던 글씨가 무색하게 배정받은 곳은 마취회복실(PACU)이었다. 뽑기 게임에서는 늘 이상하리만큼 운이 없었다. 수술 전 환자에게 마취하고, 수술 중 적정 수준의 진정을 유지하기 위한 모니터링을 하고,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는 환자에게 회복 간호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1지망이 안 되는 것이라면 2지망 혹은 3지망 어디라도 걸렸으면 좋았을걸. 마취회복실은 4지망, 5지망도 아닌 기피 부서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치기가 아니라 분명하게 싫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마취와 회복 간호가 주요 업무이기에 트레이닝 교육과정이 일반 간호사와 조금 다르다는 것. 둘째, 병원 안에서도 폐쇄적인 수술실 안에서, 그리고 수술실 내부에 위치한 회복실에서 일하기에 웬만한 다른 사람은 부서 사정을 알 수 없다는 것.
업무를 익히느라 어지러운 나날이었지만 촘촘한 모래알에도 바닷물이 스미는 것처럼, 부서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약물과 의료 장비로 즐비하던 머릿속을 꼼꼼히도 채웠다. 그러던 중에 먼저 입사하여 어엿한 1인분의 몫을 다하는 대학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다.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컴퓨터 대화창으로 안부를 묻다가 마취회복실은 어떠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앞선 두 가지의 이유를 들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적용하기엔 너무 다른 곳이라고, 간호의 영역을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유가 이곳엔 없는 것 같다고, 그래서 처음이어서 어려운 것과 별개로 마음이 힘든 요즘이라고 답했다.
“그래도 거기(마취회복실) 꿀 빨잖아.”
우리가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를 마주하고 있었다면 달랐을까. 병동에서는 보호자와 환자가 어떻고, 식사 교대가 어떻고. 이어지는 말이 수두룩했지만 귓가에는 꿀 빤다는 말만이 벌처럼 윙윙댔다. 바닷물에 잠긴 모래알은 이리저리 흩어져 까슬거렸다. 세 번째 이유였다. 출입하는 사람이 적어서 본 사람 없이 말만 무성한 곳, 딱히 힘들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아 편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곳, 꿀 빤다는 소리가 판을 치는 곳.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곳과 비교하여 몸을 많이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시끄러운 기계음이 가득한 수술실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염예방의 목적으로 한겨울에도 16도 언저리를 유지하는 곳에 있느라 여름에도 몸살감기에 걸린다는 것을. 너희가 말하는, 몸을 덜 쓰는 모니터링 업무를 제외한다고 해도, 다른 업무에서는 만보를 거뜬히 넘는 걸음을 종종거린다는 것을. 편한 부서의 지표처럼 인식되는 높지 않은 부서 이동률이 이동 대상이 되는 육아휴직 3개월의 기간을 채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혹은 마취회복실과 외상 마취회복실 사이의 이동이 외부에 크게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는 할까.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겹겹이 싸여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많은 사실을, 내가 몸담은 이 부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알고 있는 것은 오해이고 다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리는 ‘조상한테 덕을 쌓았네’나 ‘마취과 꿀이네’의 답답한 소리는 어린 시절 말싸움에서 도무지 이겨낼 재간이 없던 ‘응~ 반사’ 같았다. 부아가 치밀고 가쁜 호흡으로 몸을 들썩였지만, 다시는 병원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며 어리석은 노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위로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힘들다고 생각해야 버틸 수 있던 시기였을 수도 있다.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일부러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질량보존 법칙에 따라 개인의 고충으로 좁아진 마음에 타인의 처지까지 다정히 여길 인심의 여석이 없던 탓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힘들고 애처로운 존재로 생각하니까. 당시에는 나도 내가 지구상에서 제일 측은하다고 생각했으니 이해는 간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허투루 단정 지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하물며 실제로 꿀을 빠는 벌들도 초당 90번의 날갯짓을 하며 꽃 사이를 옮겨 다닌다는데, 날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꿀 빠는 일을 쉽게 치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분주하게 꽃을 빨고, 가루를 나르는 벌이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꿀 빠는 일이 쉽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의 노력을 함부로 깎아내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입 안 서서히 사라지는 꿀맛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