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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Sep 06. 2024

불고기와 달동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 무거운 짐을 두 손 양껏 쥐고 동그랗게 굽어진 언덕을 오른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과 달리 느릿한 발걸음 끝에 이마에는 송골송골 작은 땀방울이 맺히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도착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지만 어김없이 눈과 코를 강타하는 매운 냄새. 역시 불고기구나.

 

‘할머니 저희 왔어요.’

불고기는 할머니의 대표 메뉴였다. 언제, 어떤 일로 할머니네 집에 가도 늘 저녁상에는 불고기가 올라왔고, 가끔 양을 넉넉히 할 때면 다음 날까지도 불고기는 줄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지금 고기를 재울 양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마트만 가면 갈비찜 양념, 된장찌개 양념, 하물며 오이소박이 양념까지. 없는 것이 없는 시대라지만 당시에는 일일이 재료를 손질하여 만드는 일명 DIY 양념 시대였다.

양념을 만들 때는 여실 없이 누가 가장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다디단 사과부터 시작해 배와 마늘, 양파까지 순서대로 강판에 갈다 보면 마늘의 단계에서 어린 나는 코를 막기 시작했고, 양파가 등장할 때면 엄마는 곳곳의 창문을 열었지만, 알싸한 향이 온 집 안을 가득 채운 후가 되어서도 할머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양파를 갈고 있었다.

 

내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찬물 세수를 하는 동안 할머니의 손에서 재워지고 볶아진 불고기는 반지르르한 하얀 쌀밥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고, 나는 마치 지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 그 짭조름하고도 달큰한 맛을 음미하며 밥을 몇 그릇이나 비워냈다. 지금도 명절에는 어김없이 불고기가 식탁에 올라오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더 이상 집안에서는 양파 매운 향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편리해진 시대에 맞춰 더 빠르고 간편하게 불고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더 크다고 하지 않는가. 눈물로 얼룩진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인지 입에 넣자마자 나를 감탄하게 만들던 그 맛을 더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다.

 

식사를 마친 후엔 남산만 해진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자주 언덕을 올랐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구불구불 꺾인 골목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었고, 그곳에선 서울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작은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크리스마스 조명처럼 아기자기하게 빛나던 창문의 불빛들. 길잡이처럼 가깝고도 높게 솟은 63 빌딩과 선명한 남색 하늘 위 밝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선선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 우리의 저녁 코스였다.


달동네는 전쟁 후 피난민이 모여 판자촌을 형성한 마을을 칭한다고 하는데 집세를 다달이 내는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달구경을 하는 것이 우리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에 달동네는 여기 한 곳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서울의 밤하늘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었으니까. 2000년대를 지나며 할머니가 살던 흑석동 달동네는 서울시 대규모 재개발을 거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지난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이 곧게 뻗은 아파트는 예전보다 하늘과 더 가까이 닿게 되었지만 어쩐지 그 집에서는 바람을 느낄 수도,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함께 한 사람도, 음식도, 공간도 모두 사라져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오래되어 흐릿하지만 그럼에도 잊히지 않고 곱씹게 되는 기억. 그것을 나는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불고기, 할머니의 집 그리고 흑석동 달동네는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새 아파트로의 이사 후 나는 연신 신이 났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나는 울지 않고 덤덤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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