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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격 회사 빌런 등장_(1)

[0개월~2개월] 언니, 도대체 왜 이래요?

by 하이히니

빡센 인턴생활을 뒤로 하고, 드디어 나는 ‘B’라는 공공기관에 입사하게 되었다. 정규직으로! (ft. 경쟁률 200:1)


이렇게 인턴생활이 힘들었는데, 진짜 회사생활은 훨씬 더 순조로울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출근길은 더없이 벅차고 힘찼다.


두 달 동안 별 일 다 있었는데, 이것보다 이상한 회사가 있겠는가!


그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신입직원 교육을 받으러 가니, 50명 정도 되는 동기들이 한없이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긍정의 힘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동기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민경. 동기 전체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던 나보다 10살 정도 나이가 많은 그녀는, 교육 내내 불만과 부정적 평가를 쏟아냈다.


“Oops...! 너희 여기 음식 입에 맞니?”, “OMG! 여기 공기가 탁하지 않니?”, “침대 좀 불편하지 않니?”, “너희 같은 ‘보통’ 한국인들은 이 교육 괜찮니?”, "Stop! 조금 시끄럽다. Isn't it?" 등등..


거의 언제나 우리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섞어 말하던 그녀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작고(아마 160cm도 되지 않을 것 같다.) 통통한 편이었다. 하지만 손과 발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컸다. 그래서인지 손을 움직이면서 말할 때는 부채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육 내내 원색의 목폴라티와 배 위에까지 오는 청바지, 무릎까지 오는 부츠(혹은 장화?)를 자주 신어서 투우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가 스스로 한 자기소개에 따르면, 그녀의 부모님은 국제변호사이며, 본인 또한 국제변호사인 부모님 덕분에 해외 경험이 많단다. 그래서 대학도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안정적인 삶을 꾸리길 원하여서 한국으로 돌아왔단다. (근데 대학 이름은 말해주지 않았고, 나중에야 우연히 그다지 좋은 대학 출신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육이 진행되면 될수록, 동기들의 대한 그녀의 평가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고시를 준비하느라 취업이 늦은 사람들에게는 “No way...! 인생을 허비한 기분이 어때요? 돈도 없이 나이만 들고?”, 지방대를 나온 동기에겐, “아 너는 그런 대학 나왔구나. Wow... 그런 데서는 여기 입사하면 플랜칼~드 같은 것도 걸지 않니?”


그녀 덕분에 그녀가 있는 곳은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교육 내내 최대한 그녀를 피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된 나 또한 그녀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너는 남자친구 있니?”

“네. 언니는요?”

“None of your business. 음... 없어. 난 너처럼 능력 없고 의존적인 스타일이 아니거든. 내 능력 있는데 남자친구한테 의존하고 기생해서 살 필요 없잖아? ”


기생? 언제부터 남자친구 있는 것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일이 된 것인가! 그리고, 같은 전형으로 입사했는데 내가 능력이 없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나온거지?


민경이 언니 앞에선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제발 저 언니만큼은 같은 팀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우리 둘 다 비슷한 업무를 지원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역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고, 난 민경이 언니와 같은 팀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같은 팀에 배정받은 동기가 두 명 더 있다는 것이었다.

민경이 언니(34), 세호 오빠(29), 보라 언니(28), 그리고 나(24). 우리는 같은 팀이 되었다. 특히 세호 오빠는 나와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였고, 그런 점이 나를 좀 안심하게 했다.


우리가 오게 된 팀에는 나보다 네 살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이 한 명 있었다. 인사팀 직원에 따르면, 그 인턴은 이번 정규직 채용에 지원했다가 서류부터 불합격했고 그것 때문에 신입 정규직이 이 팀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특히 그보다 어린 나는, 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민경이 언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민경이 언니는 인턴이 사용했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는 짐을 빼지 않은 상태로 잠시 부재중인 상태였다. 민경 언니는 바로 자리에 앉지 못해 점점 분노하게 되었다.


몇 분 뒤, 본인의 눈앞에 인턴이 나타났으니...

“저기요, 인턴분. 지금 어디서 오시는 거죠?”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Hey, 먼저 이름 말씀 안 하시나요?”

“김은성입니다.”

"Listen. 이제 제가 그쪽 자리 쓸 거니까 깨끗하게 치우세요. 짐 싹 치우고 물티슈로 꼼꼼하게 닦고”

“아 예...”


은성님은 언니의 뜬금없는 태도에 약간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자리에 가서 하나씩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Hey! 빨리 좀 하세요. 그리고 물티슈로 제대로 꼼꼼하게 닦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저기요. 근데 계속 hey라고 하실 거면 제 이름은 왜 물어보셨어요? 그리고 앞으로 본인이 쓸 거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치우세요.”

“No way! 은성씨. 저는 정규직이에요. 이런 건 그쪽이 우리를 위해서 해야 되는 일이거든요?”


은성님의 표정에선 점점 불쾌감이 드러났고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건 보라, 세호 오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차라리 우리가 저 자리를 치우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이거 제가 치울게요. 많이 더러워요?”

하지만 우리의 민경이 언니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고,

“김현수. Stop. 물티슈 내려놔. 이건 은성씨가 할 일이야. 은성씨. 말 안 들으실 건가요?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망했다. 민경이 언니가 저 말을 내뱉은 순간,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은성님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같이 사무실을 쓰는 다른 팀 사람들도 슬쩍슬쩍 우리 팀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저런 말까지 들은 은성님은 곧장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은성님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던 민경이 언니는, 그때부터 자리에 있던 은성님의 짐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악역들이 분노해서 본인 책상에 있던 물건을 다 쓸어버리는 장면을 본 적 있는가? 나는 그걸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은성님의 짐은 책, 필기구 등등 모두 뒤섞여 땅바닥에 떨어졌고, 심지어 모니터와 키보드도 땅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이 난리통에 엄청 큰 소음이 발생했지만, 그녀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새로운 팀에 배정받은 첫날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맞나? 민경 언니는 그 난리 통에 자신의 짐을 은성님의 자리였던 그곳에 배치 완료했다.


"휴...Much better. 나, 커피 좀 마시러. 세호, 같이 가자.”


배치 완료 후, 민경 언니는 세호 오빠를 데리고 커피를 마시러 떠났다. 세호 오빠는 민경 언니를 따라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따라나섰는데 나중에 듣기론, 민경 언니를 진정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랑 보라 언니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있는 것들을 주워 은성님의 새로운 자리에 배치했다. 필기구도 연필꽂이에 모아 넣었고, 최대한 예쁜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래야만 더 큰 싸움이 나지 않으리라!


은성님은 한참 지나 자리에 돌아왔고, 민경이 언니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개심을 보였다. 다 같이 잘 지내고 싶었는데...은성님에게 인수인계 받아야 하는 것들도 있을텐데...이렇게 영영 불편한 사이가 되는 건가! 하지만, 우려와 다르게 민경이 언니가 필요 이상으로 활개를 치고 다닌 덕에 오히려 은성님은 우리에게 점점 마음의 문을 열었다.


민경이 언니가 오작교 역할을 해준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해보자면,


첫 번째는, ‘엘리트 전용 프린터’였다. 당시 우리는 팀 전용 소형 프린터기, 사무실 전체 공용 대형 프린터기 두 대, 이렇게 세 대의 프린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대형 프린터기는 자리에서 꽤 멀어서, 간단하게 인쇄할 때는 팀원 대부분이 팀 전용 프린터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민경이 언니는 나, 보라 언니, 은성님이 팀 전용 프린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너희 다 그저 그런 대학 출신이잖아? 일을 하면 뭘 하겠어? 괜히 프린터 쓰느라 소음 만들면 나 같은 엘리트들 일하는 데 방해만 되지. Right?”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와 언니는 같은 직군으로 입사한 동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표현한 대로 내가 그저 그런 대학 출신도 아니었다. 특히 세호 오빠랑 나는 같은 학교 출신이었는데 프린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므로,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어쨌든, 억울한 점은 있었지만 그녀와 갈등을 빚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능하면 멀리 있는 프린터기를 사용했다. 나에겐 유독 더 엄격하게 굴어서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팀 전용 프린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앞에선 핸드폰도 쓰지 말라나 뭐라나.


이 사태에 대해서, 은성님이 남긴 말이 있다.

"제가 군대 다시 가도 되니까 저 여자가 제발 제 후임으로 들어오면 좋겠어요." 라고...


두 번째, 그녀는 종교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그녀는 내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종교의 열렬한 신자였는데,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서 종교 관련 모임에 나올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했고, 참여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으면 내 자리에 와서 불참 사유를 물었다. 근무 시간에도 신과의 대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기도하고 뭔가를 읽는 시간을 가졌고, 그때는 자리로 걸려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선배가 업무 때문에 말 걸어도 ‘지금은 그 분과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라고 했다.


세 번째, 본인과 다른 스타일의 여자들을 골 빈 여자 취급했다. 보라 언니와 나는 둘 다 키가 꽤 큰 편이었고, 원피스나 치마, 블라우스 등을 즐겨 입었으며 잘 웃고 밝은 스타일이었다. 이런 우리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Oops.. 너네는 그렇게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니?”

“남자들이 어리면 다 좋아할 것 같지? 아니야. 지성이랑 능력이 중요해.”

“이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는 건 어때? Shame on you! 이런 거 다 여자 망신이야.”


우리를 훈계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갑자기 등장하는 영어 한 마디를 듣는 것도 생경한 일이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실제로 나와 보라 언니가 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객관적으로 봐도 옷차림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단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입은 옷들로, 비싸지도 않았고 쇼핑에 시간을 많이 쓰지도 않았다. (나는, 평소에 쇼핑하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로 싫어해서 인터넷으로 옷을 대강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호 오빠와 웃으며 대화한 직후에는 저런 훈계를 듣는 일이 더 잦았다. 나와 보라 언니 모두 세호 오빠를 그냥 사람으로서 좋아할 뿐이지, 별다른 이성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말이다.

(세호 오빠와 친한 사이라서 그냥 편하게 말하면, 오빠는 이름이 세호인게 정말 운명으로 느껴질 정도로 개그맨 조세호씨를 닮았다. 멀리서 보면 착각할 정도였고, 가끔 회사 보직자 중에선 오빠를 양배추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민경 언니는 나와 보라 언니를 거의 골빈 여자 취급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를 조금씩 따라하는 것 같았다.


“현수야, 언니 요즘 스타일 완전 다르지? 나랑 아예 똑같은 옷도 있어.”

“진짜? 나도 좀 비슷한 옷들이 많아지긴 했어. 근데 예전 보다 훨씬 보기 좋다. 선배들이 엄청 뭐라고 했었잖아.”


하지만 옷은 시작이었다. 보라 언니가 핑크색으로 네일 케어를 받고 오면 2~3일 후에 민경이 언니가 비슷한 색으로 손톱을 칠하고 왔다. 내가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파마를 하고 오면 며칠 뒤 민경이 언니도 똑같은 머리를 하고 왔다. 내가 앞머리를 자르자 다음날 민경이 언니의 이마는 앞머리로 덮여 있었다. (이건 특히 더 놀라운 일이었는데, 언니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에서 앞머리가 있으면 찐따 취급을 받아서 앞머리 있는 사람이 싫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런 그녀가 앞머리를 만든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수야, 근데 저 언니 우리한테 뭐라고 하더니, 이제 우리 따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기분이 약간 이상한 날들이 지속되던 어느 날. 그날은 내가 반묶음을 하고 온 날이었다. 화장실에 갔는데, 민경이 언니가 머리를 반묶음으로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애를 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노하우 전수를 위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언니 반묶음 하시게요?”

“No! Nope!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 하려고 했어. 너 때문에 한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정말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전까지는 설령 나를 따라 했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언니의 저 반응을 보니 정말로 그녀가 나와 보라 언니를 따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언니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이 일들이 팀 배치 후 2~3주 내에 일어난 일들이다.


팀장을 비롯한 팀의 선배들은 민경이 언니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뒤에서 욕을 하긴 했지만, 그녀를 직접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불편하다면서 그녀에겐 일도 잘 시키지 않았고,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나와 보라 언니, 세호 오빠에게 나눠줬다. 어쨌든 우리는 야근하면서 열심히 일했으니까. 그렇게 우리 희생 속에 팀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듯했지만, 이런 상태가 어떻게 계속 잘 굴러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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