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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Sep 30.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5

5
 태호와 홍지가 만나기로 한 날이다. 시간이 많은 태호가 홍지의 집이 있는 용인으로 왔다. 저녁식사와 함께 가볍게 술도 한 잔 하기로 해서 태호는 괜찮은 와인 한 병을 챙겼다. 일이 바쁜 탓에 홍지는 약속 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두 사람은 거의 일 년 만에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음식 주문하는 것도 잊은 채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한참 후에나 식사와 안주 될 만한 음식 몇 가지를 시켰다.
 "그저께 시우 만났어. 너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너는 어땠어?" 태호가 테이블 위에 놓인 포크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물었다.
 홍지는 태호가 만지는 포크를 보며 말한다. "좋은 사람 같아요. 첫 인상이 좋았어요." 
 포크 생김새가 특이하면서도 예쁘게 생겼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의 포크는 아니다.
 "너무 잘 됐다. 서로 호감이 있으니 잘 만나 봐."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고맙기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았어. 일찍 소개했으면 좋았을 텐데.”
 "궁금한 게 있는데 다른 얘기는 다 해줬는데 파혼했다는 말은 왜 안 했어요?"
 "자기가 파혼한 얘기를 했어?" 
 홍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첫 만남에서 굳이 파혼한 얘기를 하고 그래. 걔도 참 답답하다니까.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파혼했다고 하면 혹시 안 만다고 할까 봐 그랬어."
 “답답한 사람이에요?”
 “응?”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태호의 뇌는 잠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꽉 막혀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처음 만났는데 너무 솔직해서 그냥 한 말이야. 전혀 답답한 사람 아니야. 하하.” 
 "아, 그렇구나. 선배가 파혼했다고 말해줬어도 만났을 거에요. 강남에 집도 있다는데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죠."
 자신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말하는 홍지를 보며 태호는 여전하다는 듯이 웃는다. 홍지는 가끔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람들을 당황케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악의도 없다는 것을 태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우한테 강남에 있는 집 때문에 만나 보고 싶었다는 그런 말은 안 했지?”
 “당연히 안 했죠. 그것 때문에 만나고 싶었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저 예전처럼 그렇게 눈치 없지 않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 봤어.”
 “예전에는 무뚝뚝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그런 점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말하는 톤이 일정해서 무뚝뚝해 보였던 건데. 듣고 보니 말투가 좀 바뀌었네.”
 “그런 말을 너무 들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파혼은 왜 한 거에요? 궁금했는데,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어요.”
 "글쎄, 왜 파혼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선배도 모르는 구나."
 "결혼 삼 주 정도인가 남겨두고 시우가 파혼한다고 해서 깜짝 놀랬어. 청첩장도 다 돌렸는데 말이지. 그때 영화 때문에 바빠서 얼굴을 자주 못 보던 시기라 물어볼 기회가 없었어. 처음에 시우 부모님의 반대가 좀 있었거든. 그런데 아마 그게 파혼한 이유는 아닐 거야. 결국에는 승낙하셨으니까."
 "그럼 혹시 왜 반대하셨는지는 알아요?"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친구 부모님이 이혼했나 보더라고. 그것 때문에 반대하셨어. 시우 말로는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아서 연락을 전혀 안 한다고 했어. 아버지와 살고 어머니랑은 아예 안 보고 산다고 했던 것 같아."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여자친구가 결혼해도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았어.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날까지 잡아 놓고 파혼하지는 않았을 것 같단 말이지.”
 태호의 표정은 마치 풀리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고심하는 수사관 같다.
 “아이는 왜 안 낳으려고 한 거에요? 나는 꼭 낳을 건데.”
 “그것도 잘 모르겠어. 부모님 이혼으로 어렸을 때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지.”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득해 결혼 승낙까지 받았으면 둘이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라고 홍지는 생각했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혼 삼 주 앞 두고 파혼을 결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결혼식장을 정하고, 신혼여행도 예약하고, 주위 사람한테까지 다 알리고 파혼을 결정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둘 중 한 명에게 절대 결혼하지 못 할 이유가 생긴 게 분명하다.
 “그런데 선배는 기억력이 진짜 좋다. 나는 지나간 일을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이에요.”
 “나는 주위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 주의 깊게 보고, 듣고, 생각도 해보고 하니까 기억에 잘 남는 것뿐이야. 다른 사람에 비해서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야. 이야기를 만들려면 상상력만큼 관찰력도 중요하니까.”
 “만약 결혼할 사람이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면 선배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을까요?”
 “글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태호는 숨을 깊이 한 번 들이 마신다. “아마도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했을 것 같아. 우리 아버지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람이거든. 엄마는 이해심이 많은 편이라 반대 안 했을 거고. 아버지도 결국은 허락했겠지. 자식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사업을 하면서 그런 성향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사업이 망할 뻔한 위기를 여러 번 겪으면서 모든 것을 본인의 뜻대로 철저하게 통제해야만 마음이 놓였던 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서류 한 장 삐뚤게 놓여있는 법이 없었다. 모든 물건이 항상 모퉁이의 각과 정확하게 일치했고 책상 끝 선과는 평행하게 놓여 있었다. 각도가 영점 일 도만 틀어져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초등학교 이학년 때였을 것이다. 한번은 태호가 자기보다 덩치가 큰 친구와 싸우다가 맞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상처와 멍 자국이 생겼다. 어머니는 심하게 다친 데는 없는지, 얼굴에 흉터가 남는 건 아닌지 크게 걱정을 하며 태호를 위로했다. 반면 아버지는 괜찮으냐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없이 앞으로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부득이하게 싸우더라도 이길 수 있는 애와만 싸우라고 했다. 어린 태호에게 아버지의 말은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쏟고 헌신적인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타고난 예민한 성격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기분에 민감한 태호는 언제나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의 사업은 형이 이어받았다. 태호는 절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어릴 때부터 다짐했다. 형이 법인 대표이사로 있지만 최대 주주인 아버지가 모든 중요 의사결정을 직접 행사하고 있어 실질적인 최고 경영자는 아버지나 마찬가지이다. 은퇴할 때가 되었는데도 실권을 넘기지 않는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 밑에서 불만 없이 일하고 있는 형이나 태호는 이해가 안 된다. 

“선배 결혼할 때는 부모님께서 반대 안 하셨어요?” 홍지가 물었다.
 “반대 안 했어. 아버지는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인데 우리 와이프를 엄청 마음에 들어 했어. 지금도 나보다 와이프를 더 좋아해.”
 “까다로운 분이신데 어디가 맘에 들었을까요?”
 “집안도 좋고, 학벌도 좋고, 직장도 좋은데 다니니까 맘에 들어 한 거지. 우리 집이 좀 그래. 오히려 장인어른, 장모님이 처음에 반대하셨어.”
 “영화 일 한다고요?”
 “맞아. 아무래도 불안정한 직업이라고 많이들 생각하니까. 영화 만들어서 돈 많이 벌거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설득했어.”
 "그랬구나. 설득이 쉽지.." 말을 하다가 홍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생각났는데요. 혹시 큰 병에 걸렸던 것은 아닐까요?"
 "누가?" 태호는 무슨 뜬금 없는 소리를 하냐는 눈빛으로 홍지를 본다.
 "그 여자친구가요. 파혼 말이에요."
 태호는 그제서야 홍지의 말을 이해했다. "아, 그럴 수 있겠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야."
 "그렇죠? 제 말이 맞을 것 같아요. 그거 말고는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어 보여요."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홍지는 그냥 그렇다고 확신했다.
 시간이 꽤 지났다. 어느새 와인 한 병을 비웠고 주문한 음식도 다 먹었다.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다음에는 시우랑 같이 보자.”
 “좋아요. 언제 볼까요?”
 “응? 아.. 일단 너희 둘이 친해지고 그 다음에 보자. 이제 겨우 한 번 만났잖아. 얼른 친해져. 밀당 같은 거 하지 말고.”
 “알았어요. 앞으로 자주 봐요.”


태호는 대리기사를 불러 자신의 차로 홍지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향한다. 차는 서울 방향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뒷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본다. 늦은 밤이어서 차가 많지 않다. 대리기사는 작은 미동도 느껴지지 않게 미끄러지듯 운전하는 능숙한 실력을 갖췄다. 쭉 뻗은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와 지금 태호의 기분은 일치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도로와 달리 태호의 마음은 울퉁불퉁 그 자체이다. 둘이 잘 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기뻐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서 태호는 아내와 함께 와인 한 병을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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