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킥더드림 Sep 29.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4

4
 그날 밤. 
 시우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조깅을 하려고 집 근처 한 고등학교에 왔다. 해는 완전히 져서 어둠이 내렸고 운동장 구석에 띄엄띄엄 서있는 키 큰 가로등이 학교를 희미하게 비춘다. 이 학교는 인근 동네 주민들을 위해 밤 열 시까지 운동장을 개방한다. 운동장 가운데에서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 한 쪽 구석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학생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장난치는 남학생들, 담소를 나누며 트랙을 따라 걷는 어르신들,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 모두들 각자의 방식대로 운동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우는 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팔, 다리, 목, 어깨를 풀어주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고개를 뒤로 젖혔을 때 커다란 보름달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서 이 곳까지 오는 오 분 동안 보름달이 떠있는 줄 전혀 몰랐다. 하늘에 환한 보름달이 떠 있는 것을 알고 나니 이상하게 운동장이 더 밝아 보인다. 역시 사람의 눈과 마음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몸을 다 푼 후 사백 미터 트랙을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점심 때 태호와 나눴던 대화 중 몇 가지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다닌다.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들과 홍지의 이미지가 완전히 상반된다는 사실을 태호에게 듣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전 여자친구들이 스타일이 다 비슷하다는 것 또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곰곰이 따져 보니 맞는 말이다. 내가 키가 큰 여자를 좋아하나? 아마도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아니다. 인지하지 못 해서 그렇지 키 큰 여자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자마자 홍지가 마음에 든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아니면 파혼 때문에 반사적으로 선미하고 겉모습이 정반대인 스타일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잘 모르겠다. 한 바퀴를 지나니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좀 더 거친 호흡을 느끼고 싶어 달리는 속도를 높인다. 예전에 만났던 여자 친구들이 키가 다 컸고 수수한 스타일이었던 것은 그냥 우연 같다. 과거에 누굴 만났든, 스타일이 어찌되었든 간에 지금은 어떻게든 홍지랑 잘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헉헉” 숨이 점점 차오른다. 


세 바퀴째 뛰고 있다. 태호가 감독이 되기 전까지 돈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는 사실을 시우는 오늘 처음 알았다. 당연히 부자인 아버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부인이 혼자 벌었으면 당연히 그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 바퀴를 뛰었고 네 바퀴째에 접어든다. 태호는 자신과 홍지의 성격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수입과 경제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소개를 해준 거라고 했다. 결혼생활을 지속하는데 인품과 경제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시우는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한 번도 그런 조건을 따져 본적이 없었다. 이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긴 시간을 함께 보내려면 그런 고려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오죽하면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너무 그런 조건을 따지는 건 왠지 낭만적이지 않다. 그렇다. 전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런 걸 따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마음이 괜히 씁쓸해진다. 원래는 다섯 바퀴를 돌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지 도저히 안될 것 같다. 네 바퀴를 뛰고 멈추었다. 허파가 터질 것만 같다. 시우는 양손을 무릎에 지지한 채 허리를 숙이고 숨을 크게 몰아 쉰다. 가쁜 숨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양팔을 벌려서 가슴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크게 호흡하며 걷는다. 한 바퀴를 천천히 걷고 다시 네 바퀴를 뛰기로 한다. 


걸어서 한 바퀴를 돌았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시우는 막연하게 창작하는 예술가들은 계산적이지 않고 자신의 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인 줄만 알았다. 그건 만들어진 이미지인가 보다. 오늘 나눈 대화는 순수한 예술가로만 생각했던 태호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양재천에서 헤어질 때 태호의 모습은 예전보다 눈매는 치켜 올라갔고 코끝은 뾰족하게 길어졌으며 턱 선은 깎은 듯 날카로워 보였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태호는 정말 영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고, 영화와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에 대해서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중학교 때 태호의 방의 책장 한 쪽을 영화 잡지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 잡지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외국 잡지까지 실제로 읽는지 시우는 궁금했다. 전체를 읽지는 않지만 관심 있는 영화의 기사는 영어와 불어 사전을 찾아가며 읽는다고 했다. 당시 중학생의 눈으로 영화감독에게까지 많은 관심을 두고 해외 영화잡지까지 수집하고 읽는 태호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막 두 바퀴를 뛰었고 이제 세 바퀴째이다. 처음 뛸 때만큼은 아니어도 갈수록 호흡이 거칠어진다. 태호는 대학에 가서 영화 동아리 친구들과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시우는 소극장에서 태호가 만든 영화를 봤었다. 하지만 그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이 대학에 가서 진짜로 자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신기해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 시우의 머릿속에 순수한 이미지로 각인됐을지도 모른다. 직업 영화 감독이 된 태호를 그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고 있었나 보다. 이유야 어찌됐든 오늘 태호는 예전과 달라 보였다.


마지막 네 바퀴째 뛰고 있다. 마지막 지점까지 백 미터 정도 남았고 남은 거리를 전력을 다해서 뛰었다. 심장은 터질 것같이 쿵쾅거리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숨쉬기는 버겁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은 어느새 가고 없다. 아이들이 떠난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으로 가서 하늘을 보고 발라당 누웠다. 반복해서 거칠게 숨을 내뱉는다. 둥그런 보름달은 어디 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깜깜한 하늘에 홍지 얼굴이 떠오른다. 시우는 손을 뻗어 홍지의 볼을 만지는 시늉을 한다. 그 탄력 있는 감촉을 상상으로 느껴 본다. 손 끝이 짜릿짜릿하다. 이제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자꾸 생각난다. 아무런 기대 없이 멍하니 있는데 느닷없이 유령처럼 나타난 홍지에게 홀리고 말았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아름다운 밤이다. 시우는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학교를 나왔다.
 홍지에게 톡을 보낸다.
 『홍지씨!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저는 지금 막 운동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네, 잘 보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계획에 없던 업무가 갑자기 떨어지는 바람에 그 일 처리하느라 정신 없는 하루였어요. 꼬박 네 시간 이상을 완전히 집중하면서 일했어요. 다 끝내고 나니까 너무 지치더라고요. 오늘은 정말 목요일 같은 화요일을 보냈어요. 지금 운동하셨구나. 저도 방금 운동 마쳤거든요. 필라테스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지금 우리 둘 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라니 신기해요. 그런데 어떤 운동하셨어요?』
 목요일 같은 화요일? 홍지에게는 일주일 중 목요일이 가장 힘든 날인가 보다.
 『ㅎㅎ 정말 신기하네요. 저는 조깅했어요. 오랜만에 뛰었더니 힘들더라고요.』
 『조깅하셨구나. 저는 조깅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조금만 뛰어도 너무 힘들고 지쳐요. 그러다 보니까 조깅을 꾸준히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예전에 다이어트에는 유산소 운동이 좋다고 해서 조깅한 적이 있었거든요.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 한 한 달 했나? 아니다 두 달은 했던 것 같아요. 두 달 정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꾸준히 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어요.』
 시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톡을 보낸다. 『맞아요. 힘드니까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죠. 저도 그래요. 오늘 오랜만에 뛴 거에요.』
 『그렇죠? 조깅이 그렇다니까요. 뛰다 보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 그렇다고 금방 포기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저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도전해봐야겠어요. 그때는 정말 꾸준히 한번 해보려고요. 포기하지 말고요. 제가 오늘 저녁으로 돈가스를 먹었거든요. 이런 날에 유산소 운동이 딱인데 말이죠. 말 나온 김에 주말에 백화점 가서 조깅화를 살까 봐요.』
 『누구나 꾸준히 하긴 힘들죠~ 나중에 같이 조깅해요. 같이 뛰면 나을 거에요.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면 저녁 같이 먹을까요?』
 『네~ 토요일 시간 괜찮습니다. ^^ 우리 그날 맛있는 거 먹어요!!!』
 홍지는 메시지를 보낼 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 번에 많은 내용을 담아서 길게 쓴다. 마치 직접 대면해서 대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유독 더 그런 편이다. 매일 연락을 하니까 홍지는 서로가 더 친해졌다고 느끼는 듯 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더 많아졌나 보다. 그런 생각에 시우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전 03화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