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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Sep 30.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6

6
 따뜻한 토요일. 시우와 홍지가 두 번째 만나는 날이다. 무엇을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시우는 일주일 내내 고민했다. 
 ‘영화를 볼까? 영화 보다는 공연을 좋아하려나? 교외로 나가는 게 어떨까? 요즘 날씨도 좋은데 드라이브도하고 바람도 쐬면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평범한 거 말고 무언가 새로운 건 없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 전 연애사가 화려한 대학 동창 윤정이에게 조언을 구하려 전화를 했다. 
 “소개받은 여자는 너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아?” 윤정이가 물었다.
 “나한테 호감이 있어.” 망설임 없이 시우가 대답했다.
 윤정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말한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서 대화를 많이 나눠.”
 “그냥 맛있는 것만 먹으라고? 그런 거 말고 재미도 있으면서 뭔가 특별한 거 없을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거 말이야. 연애하면 김윤정인데, 너는 많이 알 거잖아.”
 “네가 이래서 안 되는 거야. 이제 겨우 한 번 만났다면서. 특별한 건 나중에 찾고 지금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같이 맛있는 거 먹어.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활동을 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단 말이야. 여자와 남자가 만나고, 음식을 함께 먹고. 이게 딱 생존과 번식을 위한 활동이거든. 상대가 너한테 호감이 있다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데이트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재미? 네가 재미있게 얘기하면 되는 거야. 상대방 얘기도 잘 들어주고. 알아들었냐? 이 바보야.”
 생존과 번식 때문에 그냥 맛있는 것만 먹으면 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미심쩍은 말이지만 윤정이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믿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끝에 도곡동에 괜찮은 멕시칸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저녁과 함께 술 한잔 하기에도 좋아 보이는 곳이다. 둘 다 약속 시간 보다 십분 일찍 도착했다. 테이블이 많지 않은 아담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다. 가장 좋아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같이 음식을 고르기 위해 홍지와 시우가 메뉴판을 함께 펼치던 도중 서로의 손등이 스치듯 닿았다. 찌릿한 전율이 지나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메뉴 고르기에 열중한다. 주문 받으러 온 종업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나쵸를 올려 놓는다. 소고기 퀘사디아, 새우 타코, 아보카도 치킨 브리또, 그리고 시원한 생맥주를 시켰다. 맛있는 걸 먹을 생각만으로 홍지는 기분이 들뜬다. 매콤한 살사 소스에 나쵸를 찍어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전날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내일 만나면 서로 말을 높이지 말자고 했다. 두 번째 만나서 바로 말을 놓으려니 두 사람 모두 어색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어색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사라졌다. 시우는 그 동안 홍지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맥주가 가장 먼저 나왔고, 주문한 음식들도 하나 둘 테이블 위에 놓인다.
 홍지는 지난 밤 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어젯밤 꿈에 말이야.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있는 어두컴컴한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어.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말이지. 주위에 사람은 전혀 없었어."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우가 묻는다. "걷고 있던 길은 어디였어?" 
 "어디인지는 모르겠어. 도심 속 산책로 같은 곳이었어. 한참 걷고 있는데 어떤 커다란 나무 위에 올빼미가 있는 거야. 그 올빼미가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 보는 거 있지. 올빼미를 마주하는 순간 깜짝 놀랐고 너무 무서워서 바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어.”
 “무서웠다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에 올빼미를 마주쳤다고 상상해 봐. 얼마나 무서웠겠어. 어쨌든 도망가고 있는데 잘 뛰어지지가 않는 거야.”
 “뛰는 꿈은 항상 그렇다니까. 어떤 기분인지 나도 잘 알아.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막 미칠 것 같잖아.” 
 ”바로 그랬다니까. 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거 있지. 뒤돌아 보니까 올빼미가 날아 올라서 큰 날개를 펄럭이면서 나를 따라오고 있더라고. 정말 공포스러웠어. 계속 열심히 뛰려고 하는데 여전히 잘 안 뛰어지더라고. 그 올빼미가 몇 번의 날갯짓으로 허둥대고 있는 내 앞에 사뿐히 내려 앉았어. 깃털 몇 개가 빠져서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너무 놀라서 뒤로 자빠졌고 올빼미는 넘어진 나를 가만히 쳐다 보고 있는 거야. 무서워서 앉은 채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데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그 올빼미가 사람으로 변했어.
 "올빼미가 사람으로 변했다고? 아는 사람이었어?” 
 "그 때 잠에서 깨는 바람에 누구인지는 못 봤어."
 "아, 결정적인 순간에 깼구나. 올빼미가 사람으로 변하다니 동화 같은 꿈이네. 그런데 올빼미를 보고 왜 도망간 거야?"
 "징그럽잖아. 나 새 무서워한단 말이야. 엄청 큰 올빼미였어. 그리고 동화 같지 않고 공포영화 같았어."
 "난 올빼미 귀엽던데. 그나저나 변신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네."
 "이 꿈은 무슨 의미일까?" 
 "의미? 글쎄, 잘 모르겠어. 평범한 꿈 같지는 않아 보이기는 해.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말이지.”
 "그렇지? 꿈이 진짜 생생했어."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올빼미가 변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할 것 같아. 만약 다음에 같은 꿈을 꾸게 되면 변신한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확인하고 깨도록 해."
 홍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무서워서 다시 꾸기 싫어.”


즐거운 시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맛있는 음식에 온몸에는 취기가 돌며 마음에 드는 사람은 바로 눈앞에 있다. 홍지의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시우의 눈매가 이렇게 매력적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해가 진다. 입구의 큰 창을 통해 노을 빛이 레스토랑 안으로 깊게 들어온다. 홍지도, 시우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다 금새 해가 넘어가 어둠이 석양을 집어삼켰고 실내는 은은한 조명 빛만 남았다.
 "그런데 말이야. 왜 지금껏 연애를 한 번도 안 했어? 인기도 많았을 텐데." 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홍지는 스무 살을 훌쩍 넘은 어느 시점부터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꽤 컸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십 대 후반이 되었을 때는 자신이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이 많았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 같아.”
 “못 한 거라고?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못 한 거 맞아. 예전에 한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너는 세상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오로지 자신한테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처음에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고 그냥 흘려 듣고 말았어.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나는 왜 연애를 못하지 하고 고민을 할 때 문득 그 친구의 말이 떠오르더라고.”
 그 어떤 공감의 간투사도, 작은 끄덕임 조차 하지 않은 채 시우는 숨죽여 듣고만 있는다.
 “그래서 진짜 그런가 하고 내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 봤어.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어. 어머니는 갑자기 일을 하게 됐고 네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이전처럼 세세하게 챙길 수가 없게 됐지. 우리 형제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각자 스스로를 돌봐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둘 심적인 여유가 없었어.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기분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돼버렸어. 서른이 될 때까지 그렇게 주위에 관심도 없고 내 자신만 생각하면서 살았어. 그렇다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야. 그런 마음은 매우 컸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고, 주위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걸 알아채는 눈이 나한테 없었던 것 같아."
 "누군가를 소개 받아서 만나본 적은 없었어?”
 "있었지. 소개 받고 몇 번 만나고 나면 남자 쪽에서 연락을 안 하더라고. 내 동생 말로는 내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랬을 거래.” 
 "이상한 말? 그건 동생이 농담한 거겠지. 얘기 들어보니까 사는 게 바빴겠네. 얼마나 정신 없고 힘들었을지 눈앞에 훤히 그려져. 거기다가 사람 사귀는 게 조금 서툰 면도 있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은 엄청 많아. 사실 나도 좀 서툰 편이야.” 
 홍지가 밝게 웃는다. "하하. 고마워.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 동안은 내 삶과 관련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어.”
 “이제부터라도 관심사를 좀 넓히면 되지.”
 “대학 때 주위 친구들을 보면 좋아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나는 그런 게 없더라고. 나도 남들처럼 취미를 가져 보기로 했어. 그러던 차에 태호 선배가 나만 보면 영화 얘기를 엄청 많이 하더라고. 그래서 한 때 선배 따라 다니면서 영화 많이 봤어."
 "그랬구나. 영화는 재미있었어?"
 "응. 그때 진짜 영화 많이 봤어. 지금까지 영화 보는 게 유일한 취미야."


어느 틈에 시간이 그렇게 갔는지 어느덧 이슥한 밤이 되었다. 홍지와 시우는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분다. 시우는 용인까지 바래주겠다고 했으나 홍지는 다음에 꼭 바래달라는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타고 갔다.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던 것이 시우는 의아했으나 홍지의 말을 듣고 나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집으로 가는 길에 운이 좋게도 자신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지를 만난 것도 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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