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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1.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7

7
 일주일이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 태호와 시우는 함께 점심을 먹고 양재천에 왔다. 시우가 급하게 화장실에 간 사이 태호는 벤치에 앉아 있다.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주변의 나무를 살펴보기도 한다. 얼마 전보다 신록이 더 짙어졌다. 키 큰 나무들은 하늘에서 내려 쬐는 햇살을 그대로 받고 있다. 그 빛을 맞은 엽록소 분자에서 전자가 튀어나온다. 떨어져 나온 전자는 물 분자를 때려서 쪼갠다. 수소는 이산화탄소를 만나 탄수화물이 되고 산소는 공기 중으로 빠져나간다. 동물은 그렇게 만들어진 산소와 탄수화물로 에너지 대사를 하고 나서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내보낸다. 이 놀라운 지구의 순환계에서 인간의 호흡은 없어도 그만이다. 지구를 지배하는 건 식물이라고 태호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굳이 이 행성에 인간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예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유일한 안타까움이다. 혼자 잡다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웬 육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가 유모차를 밀고 가다가 옆에 앉는다. 유모차에는 태어난 지 몇 달 안돼 보이는 아기가 누워있다. 남자는 소매를 정성스럽게 접은 하얀색 린넨 셔츠에 카키색 배기팬츠를 입고 있다. 며칠 전에 자른 듯한 숱 많은 하얀 머리는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서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겨 모양을 냈다. 거기에다 세련된 검은색 뿔테안경을 썼다. 패션 잡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스타일이 좋다. 끌고 온 유모차도 매우 고급스러워 보인다. 나이를 미루어 볼 때 할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아니다. 아기의 아버지일 수도 있다. 남자는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몇 번 웃다가 스마트폰을 본다. 유모차에 탄 아기는 고개를 돌려 태호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아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계속 태호를 본다. 아기를 향해 윙크를 했다. 아기는 다른 것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계속 태호를 본다. 반복해서 몇 번 윙크를 보낸다. 그 모습을 본 아기는 태호를 흉내 내려는 듯 한 쪽 눈을 움직이려 애쓴다. 그 모습이 귀엽다. 다시 한 번 윙크를 한다. 아기는 이번에도 한 쪽 얼굴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가며 윙크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뜻대로 윙크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태호를 향해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옹알옹알 소리를 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계속 소리를 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지금 이 아기는 그레고르 잠자가 느꼈던 답답함과 똑같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을 보던 남자는 옹알거리는 소리를 듣자 고개를 돌려 아기를 보면서 활짝 웃는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유모차를 밀고 가던 길을 간다. 


그때 시우가 화장실에서 나왔고 산책길을 걷는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 형이 돈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듣고 사실 좀 놀랐어. 형을 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줄은 전혀 몰랐거든.” 
 “그랬구나. 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잖아. 지금 세상에는 자본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어렸을 때 형은 영화 얘기만 하면 눈빛이 완전히 달라지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나는 형은 돈 따위는 상관 없이 열정만으로 하고 싶은 걸 하는 줄 알았어. 중학생 때부터 해외영화 잡지를 보고 대학에 가서는 단편 영화를 만들고 하는 이런 모습이 순수한 열정에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단 말이야.”
 태호가 크게 웃는다. “하하. 누구보다 영화 좋아하지. 그러니까 지금 영화감독이 된 거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수한 사람은 전혀 아니야. 잡지를 모으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강박증이 있어서 그래. 저장강박이 있어.”
 “저장강박?”
 “응. 예전에 필요 없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어. 어렸을 때 쓸데 없는 물건을 쌓아둬서 부모님한테 많이 혼나고는 했어.”
 “듣고 보니 형 방에 잡다한 게 많았던 것 같네.”
 “그것 때문에 아버지한테 엄청 혼났었어. 그런 내 방 상태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셨지. 아버지 방이랑은 완전히 정반대였으니까. 그런데도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고. 영화잡지를 수집한 것도 저장강박이었던 것 같아. 특히 프랑스 영화잡지에 집착했어. 프랑스어를 잘 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지. 나중에는 같은 잡지를 두 권을 사서 하나는 내용을 보고 나머지 하나는 비닐 포장을 뜯지도 않고 모아두기만 했어.”
 “같은 잡지를 두 권이나..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지금도 그래?”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 어느 날 책을 보다가 우연히 저장강박이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보니까 딱 내가 그렇더라고. 이게 정신적인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니까 버릴 수 있게 됐어. 불필요한 물건을 많이 버렸고, 두 권 있는 잡지의 나머지 한 권은 전부 버렸어. 당시에 물건을 버리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 나의 뇌와 내 자신이 분리되어있는 느낌. 뇌가 알게 되면서 내가 바뀌는 경험을 한 거야.”
 “뇌와 분리 됐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음.. 저장강박이라는 걸 뇌가 알고 나니까 물건을 버릴 수 있었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체험이야. 심장이 뛰거나, 호르몬 분비를 의지로 조절 할 수 없듯이 생각과 행동도 사실은 뇌에게 조정 받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내 뇌를 그렇게 믿지는 않아.”
 “뇌가 조정한다고? 뇌를 안 믿는다고? 음..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지금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고친 거야?”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어. 지금은 특이하고 예쁜 모양의 숟가락과 포크를 모으는 걸로 대신하고 있어. 어쨌든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예술을 해도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지난 번에 영화감독이 되려고 결심한 이유 두 가지를 말하려다 못했는데, 둘 중 하나가 바로 경제적인 부분이야. 나는 앞으로 노동자와 경영자가 결합된 형태로 일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세상으로 바뀐다고 보거든. 대기업에 다닌다고 평생 경제적인 것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작은 기업은 시장과 기술 변화도 그렇고 임금상승, 복지, 근무시간 단축과 같은 변화에도 따라가기가 갈수록 어려워질 거야. 그래서 나는 점점 더 경영자와 노동자가 결합한 형태의 직업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될 거라고 봐.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국경은 더욱더 의미가 없어질 거야. 국제적으로 잘 나가는 영화 감독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제한된 기간에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것처럼 말이야. 갈수록 메리토크라시 사회가 심화될 거라고 생각해.”
 시우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프리랜서 말하는 거야? 형은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사네. 경영학과 나온 나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는데 말이지.”
 “맞아, 프리랜서라고 볼 수도 있어. 그렇게 소분화된 형태로 일하는 구조가 더욱 확대된다는 거지. 일찍이 노동자이자 경영자로 일해온 사람들이 누구겠어? 바로 예술가들이지. 특히 영화는 자본 집약적인 예술이잖아. 운이 좋으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어. 그런 점에서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해. 와이프가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거야.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진행 되고 있는 중이야.”
 “요즘 들어 형이 예전과 많이 달라 보여.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야?”
 태호가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한다. “너 들어가봐야 하지 않아?”
 “그러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시우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 “오늘은 삼십 분 정도 더 시간 있어. 팀장님이 출장 중이라서 여유가 있어.”
 태호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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