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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킥더드림 Oct 02. 2022

달빛 내리는 남산에서 9

9
 집까지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린다. 태호는 버스를 타고 갈까 고민하다가 이런저런 생각도 할 겸 그냥 걷기로 한다. 시우에게 파혼 이유를 듣자마자 괜찮은 시나리오 소재라고 생각했다. 섹스를 할 때 욕해달라고 요구한 것만으로 어떻게 파혼을 결정한단 말인가?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시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파혼할 핑계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혼을 앞두고 때늦게 적당한 핑계거리가 시우 앞에 도착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스스로도 모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초등학교 때 시우랑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시우를 처음 본 것은 아마 오 학년 때였으리라.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있는 농구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몇몇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편을 나누어 대결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우레탄 바닥에 공이 튀는 소리와 미끄러지는 운동화 마찰음은 경쾌하면서도 팽팽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태호는 학교 밖으로 가면서 농구하는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보면서 걸었다. 그 중 한 명이 시우였다. 능숙하게 공을 튀기며 빠른 몸놀림으로 수비수를 가볍게 제치고 슛을 하는 모습에 시선이 갔다. 키가 커서 그랬는지, 농구를 잘 해서 그랬는지 시우는 유난희 눈에 띄었다. 태호는 그 나이 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운동보다는 책을 좋아했다. 운동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잘 하지도 못했다. 관심이 없어서 못 하는 건지, 못 해서 관심이 없는 건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형이 운동 신경이 좋은 걸로 봐서 전자이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위안하고는 했다. 무엇 때문인지 그때 시우를 보며 저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운동을 잘 하는지 궁금했다. 그날 이후로 학교에서, 동네에서 이상하게 시우가 자주 보였다. 그때 마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치고 노는 그런 활발한 모습이었다.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맞은 편에서 시우가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는 것을 봤다. 시우 어머니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시우와 PC방에 같이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엄마가 모르는 친구가 있었네. 이 친구는 누구야?” 
 “내 친구 아니야.” 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친구는 아니고요. 얘를 지나가다가 몇 번 봤을 뿐이에요. 지금 게임을 같이 할 친구를 찾고 있는 중이거든요. 저는 오 학년 오 반 윤태호 입니다." 
 당시 시우 어머니는 무슨 이런 애가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오 학년이면 시우보다 한 살 형이구나. 시우를 모르는데 같이 PC방에 가도 되겠냐고 물은 거야 지금?" 
 그때 시우 이름을 처음 알았다.
 "네 맞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십 동 십오 층 이호에 살고 있고요.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어머니는 대기업에 다녔는데 지금은 일을 안 하세요. 두 분 모두 스카이 대학을 나오셨어요. 저도 부모님처럼 스카이 대학을 가려고 해요. 중학생 우리 형도 공부를 엄청 잘 하고요. 저 나쁜 학생 아니고 게임 같이 할 친구를 찾고 있을 뿐이에요. 학원 갔다 오는 길인데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요. 시우랑 같이 가도 될까요?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재미있거든요."
 태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방 안에서 성적표를 꺼내어 시우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시우 어머니는 성적표를 유심히 보더니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말한다. "말만 똑 부러지게 잘 하는 게 아니라 공부도 아주 잘 하는구나. 어머니 전화 번호가 어떻게 되니?”
 시우 어머니는 바로 태호 어머니와 통화했다.
 “시우야, 여기 형이랑 게임하고 올래?"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고 싶다고 했고 시우 어머니는 돈 얼마를 주면서 네 시 전까지는 반드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시우와 PC방을 가게 됐고 그날 이후로 둘은 컴퓨터 게임을 자주 했다. 시우는 운동만큼 게임을 잘 하지는 못했고,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게임은 금새 실증을 내는 성격이었다. 그 당시 시우는 어머니 말씀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다. 한창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어머니가 정해준 귀가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게임에 미련이 있어 보였지만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갔다. 가끔 부모님 뜻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기도 했던 태호는 그런 시우의 행동을 보며 자신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태호와 친하게 지내면서 시우는 학교 성적이 많이 올랐다. 특히 중학생이 되면서 태호를 따라 스터디 카페에서 가서 공부하는 날이 많았고 그때부터 시우의 성적은 두드러지게 상승했다. 태호는 자신과 같이 시우도 스카이 대학에 오기를 바랬지만 그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는 못 했다. 스카이 대학에 가기에는 집중력이 부족했다. 시우 어머니는 태호 덕분에 시우가 상위권인 누리 대학에 갈 수 있었다며 고맙다는 말을 자주했다.


집에 왔다. 아내는 아침 일찍 출근했고 아무도 없는 집은 적막하다. 움직이는 것은 조금 열린 거실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옅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는 커튼뿐이다. 태호는 손을 씻고 바로 서재로 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욕과 파혼이라.. 시우의 집은 경제적으로 꽤나 부유하다. 부모님은 자상하고 동생하고는 우애가 깊다.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자식들의 욕구를 즉각 즉각 해결해주는 편이었던 것 같다. 시우가 끈기가 없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지 않나 싶다. 다른 사람과 갈등 겪는 걸 못 견뎌 하고 웬만하면 상대에게 맞춰주는 성격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시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이러한 시우의 환경과 성향이 파혼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미쳤을까? 시우는 매우 순종적인 아이였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처음에 반대했던 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선미와의 결혼에 대한 마음의 저항선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선미는 왜 그런 성향을 갖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 시점에 그 성향을 드러냈을까? 시점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상대가 자신의 취향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혹은 취향이 같은 지를 확인하려면 연애 초기에 드러냈어야 한다. 만약 결혼할 때까지 감추고 싶었다면 결혼 후에 드러내는 것이 맞다. 아니면 끝까지 드러내지 말던가. 왜 결혼 날짜를 잡고 드러냈을까? 몇 년을 만났고 결혼약속을 했으니 이해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걸까?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사실은 선미는 시우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일부러 파혼할 명분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태호는 상체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온몸에 힘을 뺀 채 천장을 본다. 하얀 천장 가운데 LED 등이 섬처럼 자리잡고 있다. 미스터리로 가득 찬 세상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짙은 안개가 삼켜버린 낯선 도시를 헤매는 일과 같다. 아무튼 흥미롭다.
 시우에게 톡을 보낸다.
 『시우야, 조금 전에 얘기해준 파혼한 이유를 영화 소재로 써도 될까?』
 금새 답이 왔다. 『그럼 당연하지. 마음껏 쓰도록 해~』
 시우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선미를 사랑했는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사랑했다고 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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