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는 투자자산운용사를 다닌다. 지금 다니는 회사가 첫 직장이고 8년을 다녔다. 오늘은 퇴사하는 날이다.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일이 별로 없다. 최종적으로 인수인계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회사 동료들과 작별 인사 정도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출근했고 두 시간 일찍 퇴근한다. 회사 건물 앞에 정장 차림을 한 다섯 명의 동료 직원이 기우를 배웅하기 위해서 모였다. 공식적으로 일주일 후 퇴사이지만 휴가로 대체하고 실질적으로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퇴사하는 동료를 건물 밖으로까지 따라 나와서 보내주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보통은 퇴사자가 자리를 돌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전부이다. 업무가 많이 바쁜 탓에 그렇기도 하고 워낙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큼 직원들 간의 유대감이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안 볼 수도 있는 동료를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환송할 마음의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와 그 이면이 다른 것은 어쩌면 경쟁이 심한 조직의 당연한 생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우는 동료들을 경쟁자로 대하지 않았다. 배웅 나온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우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동료들이 많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기우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싫어하는 이유는 특별한 게 없다. 단지 기우가 회사에서 잘 나가기 때문이다. 기우는 최근 몇 년 동안 실적이 가장 좋은 직원이다. 경영진으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받고 있다. 개인의 연봉은 비공개이지만 기우의 연봉은 비슷한 또래 직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을 것으로 모두들 짐작하고 있다. 그 짐작은 사실이다. 성공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기우는 경계와 시기의 대상이다. 기우에게는 특유의 여유로워보이는 면모가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등바등 사는 자신들과 달리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눈에 몹시 거슬리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료들은 정말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는 것이 아니냐며 몇 번을 되묻는다. 기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일하기 싫어서 그만두는 것이고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똑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기우가 운용하는 펀드는 업계에서도 가장 높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타 경쟁사에서는 기우를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들은 아무런 계획 없이 기우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회사 측에서는 기우와 같은 인재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기우를 아끼는 임원은 아직 퇴사 처리를 하지 않았다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라고, 회유하면서 마지막까지 붙잡았다. 그러나 기우는 모래알만큼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배웅하러 나온 직원 중에 이윤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짙은 아쉬움의 눈빛을 은밀하게 기우에게 보낸다. 그 표정을 읽은 기우는 옅은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였다. 배웅 나온 사람 중 한 명인 조성재는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우니 조만간 이 멤버로 환송회를 하자고 말한다. 이윤희와 조성재는 비밀 연애를 하고 있는 사내 커플이다. 기우와 윤희는 2년을 만났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고 종종 밥 먹고 술 마시고 잠자리를 하는 사이였다. 사귀는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가 2년째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윤희가 기우를 짝사랑하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윤희가 고백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상에 명석한 두뇌를 지녔으며 성격도 좋다. 기우는 윤희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고백을 받았을 때 사귈 마음이 없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희는 그 뒤로도 기우에게 몇 번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어떻게 하다가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 술기운은 아니었다. 술은 마시지도 않았고 욕망과 사랑이 뒤엉켜서 벌어졌을 뿐이었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됐다. 윤희는 기우와 단둘이 있으면 항상 긴장 상태가 된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항상 눈치를 봤으며 모든 걸 맞추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까지도 그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보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먼저 살폈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자주 다운되는 오래된 노트북처럼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 기우는 윤희의 진짜 마음이 훤히 보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오랜 시간 단단한 바위처럼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윤희가 고마웠으나,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일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떨어뜨렸다. 기우는 누군가를 잃어버린 경험으로 인해 커다란 상실감이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그 마음이 자신의 연애를 가로막고 있다고 언제나 그녀에게 말했다. 윤희는 연애의 기술이 서툴렀고 기우는 그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기우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조성재가 자신에게 고백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가 고백했을 때 윤희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그녀는 기우처럼 손톱만큼의 여지도 두지 않았다. 자신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성재는 무례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게 간간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윤희는 자신은 긴 시간 동안 짝사랑 중이라서 다른 사람을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고백은 적어도 윤희의 떨어진 자존심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있었다. 윤희가 성재에 대해서 얘기할 때면 기우는 오히려 좋은 사람이니 만나 보라고 했다. 질투심을 유발하려는 목적과는 달리 기우는 언제나 여유 있어 보였다. 윤희는 그렇게 말하는 기우가 미웠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식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기간은 짝사랑하기에 너무 길었다. 윤희의 마음은 지쳐갔다. 그 지친 마음에 어느새 성재는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되었고 그렇게 윤희의 마음이 서서히 열렸다. 그러면서 윤희와 성재의 연애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기우와 윤희와의 관계가 끝난 건 아니었다.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둘의 만남은 계속됐다. 기우는 직감적으로 윤희가 성재를 만난다는 걸 바로 알았다. 반면 윤희는 기우가 눈치챈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우는 언젠가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달라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를 빼앗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예전 같지는 않지만 성재를 사귀면서도 자신과의 만남이 이어지자 그런 기분은 금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