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는 동료들과 헤어지고 인근에 있는 백화점에 왔다. 여러 번 왔던 매장에서 옷을 둘러본다. 다른 고객을 응대하던 한 점원이 다가와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표정과 말투에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진짜로 옷 사려고 왔어요.”
점원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오늘도 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둘러 보시고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얼마든지 입어보세요.”
“진짜 사려고요.” 기우가 눈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매장에 혼자 계시네요.”
“매니저님이 휴가여서요. 오늘은 혼자에요. 다행히도 바쁘지 않은 날이에요. 지금 입은 정장이 잘 어울리시는데 정장으로 추천 드릴까요? 아니면 지난번처럼 캐주얼한 스타일로 보시겠어요?”
“더 이상 정장 입을 일이 없어서요. 요즘 유행하는 캐주얼한 스타일로 추천해주세요.”
점원이 추천해주는 옷을 여러 벌 입어본다. 상의와 하의, 이너와 아우터를 바꿔가면서 입어보고 컬러, 핏, 스타일을 다양하게 매칭을 시도한다. 조금 더 나은 조합을 찾기 위해서 같은 옷을 여러 번 입는다. 점원은 친절함을 유지한 채 계속 응대했고 새로운 고객을 맞이하고 나면 다시 기우에게로 왔다. 기우는 입었던 대부분의 옷을 사기로 정했고,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가려고 한다.
“이 많은 옷을 다 사시려고요? 이걸 다 들고 전철 타기도 힘들 것 같은데요.” 점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택배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택배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입고 오신 정장도 같이 택배로 보내겠습니다.”
“아니요. 정장은 버릴 겁니다.”
“버린다고요?” 점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회사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장 입을 필요가 없어요.” 이번에는 기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점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넨다. “그런데 제가 전철 타고 가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아,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고객님을 봤어요.” 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서 당연히 전철을 타고 가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닌가요?”
“아, 그랬군요. 전철 타고 가는 거 맞아요. 그러면 왜 전철에서 아는 척 안 했어요?”
기우는 점원은 자신을 못 본 줄 알았다.
“워낙 사람들로 붐비기도 했고요. 출근 길이라 서둘러야 했고 제가 아는 척했는데 고객님이 저를 못 알아볼 수도 있잖아요.”
“당연히 알아보죠. 몇 번을 봤는데요. 혹시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김형서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서기우입니다.” 기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한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함께 저녁 먹지 않을래요? 오늘 회사를 그만둔 기념으로 제가 사겠습니다.”
“저녁이요?” 기우가 구매한 옷을 차곡차곡 개는 것을 멈추고 형서가 반문했다.
“네, 괜찮으면 저녁 식사 같이해요. 퇴사 기념도 있고 제가 옷도 안 사면서 여러 번 와서 귀찮게 했잖아요. 아침에 같은 지하철을 탄 것도 우연이겠지만, 신기하지 않아요?” 형서는 말없이 기우를 빤히 쳐다본다. 침묵이 흐른다. “혹시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전혀 아니에요. 제가 요즘 다이어트를 해서 저녁은 아주 간단하게 먹거든요. 치킨 샐러드, 감자, 토마토 같은 걸 먹어요. 저녁 식사보다는 차 한 잔 정도가 괜찮은데 어떠세요? 어차피 제가 조금 늦게 끝나니까 미리 식사하시고 차 같이 마셔요.”저녁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백화점을 나왔다. 입었던 정장은 길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정장을 돌돌 말아서 입구가 좁은 쓰레기통에 망설임 없이 밀어 넣는다. 옷의 부피 때문에 처음에는 잘 들어가지 않는다. 힘주어 밀어 넣다 보니 어느 순간 빨아드리듯 한 번에 들어갔다. 기우는 속이 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