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는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 최소 10분 전에는 도착해야 마음이 편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형서도 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는 점이 맘에 든다. 윤희는 만날 때마다 15분에서 20분 정도 늦는다. 그렇게 되면 10분 일찍 오는 사람은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매번 늦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윤희에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가 막 넘어가는 시점이고 카페 내부가 그리 밝은 편은 아니다. 각 테이블 위로 은은한 조명 빛이 떨어진다. 기우와 현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얼그레이 케이크 한 조각을 놓고 마주 앉아 있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조명에 비친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기우는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특히 물방울처럼 동그라면서도 가로로 긴 눈매가 그러하다. 사람의 마음이라도 꿰뚫어 볼 법한 눈매다. 미소를 지으면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면서 고양이 같은 모습은 금세 사라진다. 백화점에서는 형서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아서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지 못했나 보다.
형서는 고객과 백화점 밖에서 보면 어색하지 않을까 긴장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이상할 정도로 분위기가 편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은 느낌이다. 상류에 물이 자연스럽게 강으로 흘러들어가 듯 대화가 처음부터 막힘이 없다.
"다시 봐도 캐주얼한 스타일이 잘 어울립니다. 백화점 밖에서 보면 느낌이 다르기도 하거든요. 여전히 멋집니다." 형서가 말했다.
기우는 직업의식에서 나오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칭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지금은 고객으로 만나는 게 아닌데 굳이 그런 칭찬 안 해도 돼요."
형서가 소리를 내며 웃는다. "하하. 아무래도 직업 탓에 칭찬이 습관이 되기는 했는데, 지금 한 말은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말한 거예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멀쩡한 정장을 버릴 정도면 정말 회사 다니기가 싫었나 봐요. 왜 그만 두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회사 다니기 싫어서 그만뒀어요.”
“많은 사람들이 회사 다니기 싫어하죠. 그렇다고 그만두지는 안잖아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나요? 직원들과 관계에 문제가 있던지, 실적이 좋지 않다던지,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던지, 일이 너무 많아서 번아웃이 왔다던지.”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별 문제가 없었어요. 주위에서 제가 그만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오히려 회사 생활을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회사 다니기가 싫은 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떠오르지 않아요. 음..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 기우는 말을 멈추었다. “솔직히 말한다 단순히 다니기 싫은 것 보다는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었습니다.”
형서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재미가 없어서 그만두다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간다. “물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가 쉽지 않죠. 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럼 앞으로 재미있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으세요?”
기우가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아니요.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재미있을 지 모르겠어요. 이제부터 찾아보려고 합니다.”
형서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한다. “계획 없이 회사를 그만 둔 거예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둔 돈이 많이 있나 봐요. 부럽습니다.
기우가 양손을 흔들며 말한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재미있을 만한 건 어떻게 찾을 거예요?”
“그것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10년 후에도 삶이 재미가 없다면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할까 생각 중이에요.”
안락사라는 말에 형서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말이 농담도, 장난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락사를 말하는 그의 표정이 바위처럼 단단했기 때문이다. 형서는 그와 지금 마주보고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환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도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모아 둔 돈은 별로 없고 빚도 있어서요. 얼마 전에는 아빠가 사기도 당해서 더 힘들어졌어요.”
“아이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겠어요?”
“엄마요? 저는 엄마가 없어요.”
기우는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