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부모님이 제가 7살 때 이혼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엄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여동생이 둘이 있거든요. 어떻게 자식 셋을 낳고 그렇게 나 몰라라 가버릴 수가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요.”
“아, 그런 것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기우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현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니에요.”
그녀의 미소가 기우의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었다.
“아버지께서 자식 셋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나름 고생 많았을 거예요. 우리 집은 늘 가난했어요. 성장하면서 어린 마음에 아빠에 대한 불만이 많았어요. 아빠랑 사이가 좋을 때도 있었지만, 안 좋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형서씨, 솔직한 사람이네요. 우리가 지금 처음 얘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요. 저의 환경이 그냥 그런 거잖아요. 제가 통제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러니 솔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맞아요. 전혀 잘못한 거 없습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지는 않아요?”
“보고 싶은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궁금은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전에 주민등록초본으로 엄마 주소를 찾아보았어요. 그리고 그 집 앞까지 찾아갔습니다.”
형서는 말을 멈추고 입에 케이크 한 조각을 넣었다. 기우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케이크를 목에 넘기고 형서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커피의 쓰디쓴 진한 향이 입안에서 케이크의 달콤함과 교묘하게 섞인다.
“어머니를 만났어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기우가 물었다.
“아니요. 처음부터 만날 생각은 없었어요.”
“만날 생각이 없는데 어머니 집 앞에는 왜 갔어요?”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그 집 앞에 가보고 싶었어요.”
“의식적으로는 아니어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에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요.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형서의 솔직함은 기우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자신의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좋다. 그냥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 어찌 보면 당연한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지금 세상은 자신을 과장하고 꾸미기에 정신이 없다. 기우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만 둔 일은 본인이 직접 선택한 일은 아니었나 봐요? 그래서 재미를 못 느꼈던 것 아닐까요?” 형서가 물었다.
“맞아요. 그런데 일뿐만 아니라 삶도 내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어요.”
“스스로 선택해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가끔, 아주 가끔 뜻대로 될 때가 있죠. 그런데 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5살 때 시작해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재능이 있다며 예술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부모님께 권유했어요. 저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취미까지는 괜찮아도 전공으로는 안 된다며 피아노를 그만두게 하셨어요. 피아노를 그만두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재미있었고 또래 친구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편이었어요. 먼저 시작한 친구들의 실력을 금방 따라잡았으니까요. 어머니께 테니스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상의를 한 후 이번에도 테니스를 그만두게 했습니다.”
“피아노도 그렇고, 테니스도 그만두게 한 이유가 뭐죠?”
“웬만한 재능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어요. 아무리 어렸을 때 재능을 보여도 성인이 돼서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거죠.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해요. 이미 재능이 검증된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니까요.
“부모님 선택이 맞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저에게 그런 관심을 주는 부모님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래도 시도도 못해 본 건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미대를 가고 싶었어요.”
“그림 그리는 것에도 재능이 있었나 봐요?”
“재능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서양미술사 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책을 읽은 후 미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술에는 디자인처럼 산업 미술 분야도 있으니까 부모님이 이번에는 반대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또 반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미대는 커녕 미술학원도 못 다녀봤어요.”
“하고 싶다고 떼를 쓰거나 우겼을 법도 한데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나 봐요.”
“글쎄요.” 기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드는 아이였는지 생각해 본다. 대체로 그랬던 것 같다. 타고난 성격이 그러했던 건지 아니면 누나의 죽음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저보다 네 살 많은 누나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누나가 병으로 죽었어요. 누나가 죽은 이후로 부모님께서 많이 아파하고 슬퍼하셨습니다. 부모님 뜻에 따르는 것이 부모님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형서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어요.”
기우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에게서 티끌만큼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형서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속마음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시선을 머그잔으로 옮기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렀다고 해도 누나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형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고 했지,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 않았다. 형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혹은 아무렇지 않다고 자기 암시를 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픔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의 말이 이해가 되면서 마음이 놓였다.
“부모님 뜻을 거스르지 않은 이유도, 부모님께서 왜 자식이 안전한 길을 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형서가 손등을 긁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우가 묻는다. “모기에 물렸어요?”
“네, 카페에 오기 직전에 물렸는데 계속 가려워요. 벌써 모기가 있다니.”
“저도 여기 오기 전에 물렸어요. 여름도 아닌데 모기가 많아요. 아침에도 물렸거든요.”
“저도 오전에 물렸었어요.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요.”
“저도 그때 물렸는데, 같은 모기일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기우의 농담에 형서가 미소를 짓는다.